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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보의 풍수여행-48 '이천보선생의 고가와 묘'
2014년 11월 17일 (월) 10:17:40 안종선(교수) sungbosungbo@naver.com

   
▲ 안종선(교수)

월사 이정구 선생의 묘소를 둘러보고 관산을 마친 뒤 불과 5분 거리에 있는 이천보(李天輔,1698~1761)선생의 고택과 묘를 찾았다.

월사 이정구 선생의 묘에서 그리 멀지 않아 찾기가 어렵지 않았다. 가평군 상면 연하리 226번지에 자리잡은 이천보 선생의 고가는 조선말기의 주택건축물로서 1984년에 경기도문화재자료 제55호로 지정되었다.

이 집은 영조 때 영의정을 지낸 진암(晉菴) 이천보가 거처하던 곳으로 당시에 심은 수령 300년 이상된 연하리 향나무가 뒷뜰에 남아 있다. 그러나 건물은 고종 4년(1867)에 재건된 것이며 그것도 6․25를 거치면서 대부분이 불타버리고 현재는 사랑채와 안채의 행랑채만이 남아 있다.

현재는 안채처럼 사용되고 있지만 1987년에 보수 공사를 시행하여 사랑채 18평, 행랑채 12평을 보수하고 새로운 일각대문 및 담장 67m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현재 문간채로 쓰이고 있는 행랑채의 뒤쪽에 있었던 안 채의 터는 공지로 남아 있다. 위 문간채는 6․25 이전에는 현재 신축된 일각문 위치에 있었던 것이라고도 한다.

따라서 집의 형태와 가상(家相)은 과거와 완전히 달라졌다. 현재의 모습만으로는 가상이 좋다고 할 수 없는 불배합상태이다. 즉 집을 파악할 때는 여러 가지 파악의 요소가 있지만 동서사택 구분도 그중의 하나로 문주조가 동일사택내(同一舍宅內)에 있어야 한다.

이천보 선생의 고가는 현재 상태로만으로 보아서는 구조가 복가(福家)로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일각문의 위치와 과거 안채가 있던 공터를 참조하면 형태를 유추할 수는 있다. 당시에는 양택으로서 가치가 있는 배합사택이었을 것이다.

기념물 제 61호로 지정되어 있는 뒷뜰의 은행나무는 조선 영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이천보선생이 살던 집 후원에 심어있는 정원수로 현재 이곳에는 사랑채와 향나무만이 남아있고 주위에는 목련과 상수리나무가 다소 남아있어 옛 정취를 자아낸다.

이 향나무는 약 300년 된 것으로 가슴높이둘레 2.6m, 높이 13m, 둘레 12m의 원형을 이룬 우람한 향나무이다

이천보 선생은 문신으로 본관은 연안(延安)이며, 자는 의숙(宜叔), 호는 진암(晉庵)이다. 그의 증조부는 대제학을 지낸 이일상(李一相), 아버지는 옥천 군수 이주신(李舟臣)이며, 어머니는 광성부원군 김만기(金萬基, 1633~1687)의 딸이다.

   
그는 주로 문학에 힘써 당대에 이름이 높았는데, 그의 5대조가 장유(張維), 이식(李植), 신흠(申欽)과 함께 조선 중기 문장 4대가의 한 사람으로 꼽혔던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 1564~1635)였으니 문장에 출중한 가문의 혈통이 이어졌다고 해야 하겠다.

이천보의 약력을 좀 더 살펴보면, 1739년(영조15) 알성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1740년 정자가 되고 교리, 헌납, 장령 등을 역임한 뒤 1749년 이조참판에 올랐다. 그 뒤 이조와 병조의 판서를 거쳐 1752년 재상인 우의정에 승진하였고, 같은 해 좌의정에 올랐다가 영돈녕부사(領敦寧府使)로 전임되었다. 영돈녕부사란 왕실의 친척을 우대하기 위한 부서인 돈녕부의 책임자를 말하는데 재상과 마찬가지로 정1품에 해당한다.

1761년 드디어 최고 관직인 영의정에 올랐으나 장헌세자(莊獻世子)의 평양 원유사건(遠遊事件)에 책임을 지고 음독 자결하였다. 이 사건은 영조의 아들이자 정조의 아버지인 이른바 사도세자가 왕의 허락을 받지 않고 몰래 평양에 놀러 갔다가 그 사실이 반대파에 의해 영조에게 알려지면서 생긴 커다란 정치적 파문이었다. 이천보 선생은 당시 최고 관직자로 사건을 무마하기 위하여 스스로 자결했던 것이다.

이천보 고가의 문간채 언덕 위로는 이천보 선생의 묘소가 있는데 신도비의 비문에 의하면 단기 4308년(1975) 여름에 김포군 오정에서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되어 있다. 묘비는 그의 종형인 이조판서 이정보가 비문을 지었고 1761년에 세웠다.

묘소는 뒤를 가리듯 타원형 모양의 나지막한 산허리에 자리 잡고 있다. 언뜻 보면 산 옆구리를 파고 쓴 듯 보이나 자세히 살펴보면 범상치 않은 모습임을 알 수 있다.

묘소 뒤로는 낮기는 하지만 마치 울타리 같은 산줄기가 두르고 있으며 우선(右旋)을 살펴보면 고택을 따라 은행나무에 이르는 갈고리 모양의 작은 지각이 나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 그 지각은 유난히 살이 쪄 통통해 보이는데 중턱에 커다란 바위가 있다.

그러나 그 바위는 과거 땅속에 묻혀 있었던 듯 보이며 후인들이 주변을 다듬으며 땅속에 감추어졌던 많은 부위가 드러난 듯 보인다.

   
묘소의 청룡방향으로 바라보면 눈에 잘 뜨이지 않으나, 자세히 살펴보면 작은 지각(地角)이 나와 있다. 후인들이 산을 깎아 밭을 만들었지만 지각이 완연함을 가리지는 못한다. 애초에는 지각 끝에 거대한 밤나무가 있었던 듯도 하지만 지금은 밤나무를 베어버렸다.

묘소 뒤를 올라보면 후면에 약간 튀어나간 지각이 보인다. 그러나 오래 전 밭을 일구느라 조금 파내어 잘린 부분이 완연하다. 멀리 보이는 산은 은은하고 확연하지 않지만 휘장을 두른 듯 느껴지는 것이 아닌가?

그야말로 유귀유락(有鬼有樂)이라!
귀성과 낙산을 모두 갖추고 있으니 사전적인 와혈(窩穴)이 아닌가? 약간의 상처를 입었고 그 규모가 작기는 하지만 그 모습은 귀성(鬼星)이 확연하다.

와혈(窩穴)은 혈의 사상중 한가지로 정혈에 속한다. 와혈은 닭집, 삼태기, 소라, 활같이 오목하고 입을 벌린 모양의 혈을 말한다. 와혈은 혈을 이루는 기본 형상 중 하나로서 와겸유돌(窩鉗乳突)중 하나이다. 어떤 혈도 이 네가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간혹 괴혈이라 하여 와겸유돌이라는 기본 형상에서 벗어나는 듯 보이지만 그 성질은 이 와겸유돌의 사상(四象)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와혈이 되기 위해서는 선익(蟬翼)이나 용호(龍虎)중 하나가 길게 낚시 바늘처럼 몸을 감싸 주어야 한다. 와혈의 형태는 입을 벌리고 구부러진 것처럼 생겨야 하며 그 모습은 마치 구슬을 움켜잡은 것 같고 요자(凹子)형상을 이루어야 한다.

옛말에 이르기를 대자왈지각(大字曰地角)이라 했다. 이 말은 선익이 발달하여 크게 자라면 지각이 된다는 뜻이다. 즉, 지각은 선익이 발달하여 생기는 것이다. 두 줄기의 지각이 크게 벌어져 끝이 엇갈리듯 감싸 안아야만 된다. 끝이 벌어진 지각은 와혈을 이루지 못한다.

특히 와혈은 횡룡결혈(橫龍結穴)을 이룬다. 와혈에서는 와(窩)가 정격이 되어야 기가 모아지고 혈판의 생기가 흩어지지 않는다. 횡룡에서 결혈되는 귀성과 낙산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귀성은 반드시 있어야 혈판이 이루어지나 낙산은 없어도 혈판이 이루어진다. 유귀유락(有鬼有樂)이라 하지만 귀성(鬼星)은 필수조건이지만 락산(樂山)은 충분조건인 셈이다.

예로부터 와유현릉사(窩有弦稜砂)라고 했다. 이 말은 와혈은 입수 부위의 양 선익이 활을 눞혀 놓은 듯 몸을 감싸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혈도 마찬가지지만 입수와 선익은 필수조건이다. 단, 와혈을 소점함에 중요한 것은 귀성에서 향을 정하는 방법이며 아울러 혈장을 정확하게 소점하는 일이다.

안종선교수 블로그 http://blog.naver.com/sungbosung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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