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종선(교수)
한 잔 먹새근여
또 한 잔 먹새근여
곳 것거 산(算) 노코
무진무진(無盡無盡) 먹새근여"

송강 정철이 지었다는 장진주사(將進酒辭)다.
가사문학 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바로 송강 정철이다. 이 노래 장진주사는 학창 시절 누구나 한번쯤 읊조렸을 것이다.

장진주사는 흔히 단가(短歌)로 보지만 형태상으로 이를 사설시조(辭說時調)로 보는 견해도 있다. 권주가(勸酒歌)로서《송강가사(松江歌辭)》에는〈관동별곡(關東別曲)〉등과 함께 배열되었으나,《국조시강(國朝詩綱)》《석주집별곡(石洲集別曲)》권 7에는 단가류(短歌類)에 수록되었다. 이 노래에는 애주가로 이름 높고 또 호방하였던 작자의 성격과, 허무와 적막․애수의 정조(情調)가 서려 있다.

이른 아침부터 정철 선생의 묘소를 찾아 진천으로 출발했다.
진천의 옛 이름은 만노(萬弩)이며 예로부터 살기 좋은 고장으로 이름이 알려져 있다. 오죽하면 생거진천(生居鎭川)이라 했을까? 그 의미는 제쳐두고라도 진천이 아름답고 유서가 깊은 고장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

가을이 깊어가고 있었다. 눈이 올 것이라는 방송이 있었지만 아직은 날이 맑았다.
쉬이이이이!

바람이 불 때마다 옷 속으로 스며드는 바람이 차가워지고 있었다.
송강 정철의 묘소를 찾기 위해서는 먼저 정송강사(鄭松江祠)를 찾아야 한다. 충청북도 진천군에 위치한 정송강사는 조선 선조 때의 정치가이자 시인인 송강 정철선생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정철선생은 우리나라 가사문학의 대가로서 강원도, 전라도, 함경도 등의 관찰사로 지내는 동안 천부적 문재를 발휘하여 관동별곡과 훈민가를 지었으며, 그 뒤 낙향하여 사미인곡, 속미인곡 등 많은 가사와 단가를 남겼다.

정송강사는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봉죽리에 있는 조선 중기의 사당으로 충북기념물 제9호로 지정된 사당은 송강 정철의 유물관을 겸하고 있다.
정송강사를 찾아가는 길은 그다지 어려운 것이 아니다. 중앙고속도로 진전에서 내라 수도 있고 증평에서 내릴 수도 있는데 중평을 권하고 싶다. 증평 나들목에서 내려 오창으로 가야 한다. 증평 나들목에서 나와 우회전하면 약 6키로 지점이 오창면이다.

이 오창면에서 진천으로 향하는 17번 국도를 타면 된다. 17번 국도는 최근에 새로이 단장을 해서인지 아주 잘 당장되어 있다. 17번 도로를 따라 달리다 보면 봉죽리라는 간판과 함께 정송강사라는 간판이 매달려 있다. 정송강사라고 쓰여진 안내표지를 따라 들어가면 봉죽리이며 이 마을의 뒷산 깊숙한 곳에 정송강사와 정철의 묘가 있다.

진천에서 고속도로를 내렸다면 청주, 대전으로 향하는 17번 국도를 따라 계속 달리다 보면 삼거리가 나오는데 이곳이 바로 사석리이다. 사석리에서는 천안으로 향하는 21번 국도가 갈라진다. 17번 국도를 따라 계속 달리다 보면 제법 큰 마을이 나오는데 문백면 소재지가 바로 그곳이다. 이 마을 문백 초등학교 앞에서 정송강사에 이르는 길이 멀지 않다.

애초에 정철의 묘는 경기도 고양시 원당면 신원리에 있었다. 1665년(현종 6) 송시열(宋時烈)이 현재의 장소를 정하고 후손 정포(鄭浦)가 이장하여 사우를 건립하였다. 묘역에 이르면 먼저 위엄있는 신도비가 비각에 모셔져 홍살문 옆으로 서 있다. 큼직한 귀부를 딛고 선 비신의 글자는 오랜 세월에도 선명했고 팔작지붕에 옥개석을 얹고 있다.

시호를 따서 지은 문청문(文淸門)을 오르면 곧바로 기념관이 나오고, 다시 충의문을 오르면 위패가 모셔진 사당 송강사가 자리한다. 사당은 1978년부터 4년에 걸쳐 묘역을 정비할 때 세운 것으로 정면 3칸에 맞배지붕이다.

닫집을 세운 뒤 모신 위패는󰡐松江鄭先生󰡑이라고 빨간 함에 흰 패로 담겨 있다. 사당의 뜰에 서 있는 정철의 시비에는 『사미인곡』의 서사(敍事)가 고어체로 씌어 있는데 임금과 멀리 떨어져 있는 자신의 심정과 세월의 무상함을 읊고 있다.

정송강사는 1976년 12월 20일 충청북도기념물 제9호로 지정되었으며 영일정씨 종중에서 소유, 관리하고 있다. 조선 선조 때의 문신이자 시인인 정철(鄭撤:1536~1593)의 위패를 배향한 곳이다. 1973년 보수하였다가 1979년부터 1981년에 다시 전면 중건 정화하였다. 규모는 사당 19평, 유물전시관 32평이다.

문청문(文淸門)에 오르니 기념관이다. 유물전시관은 시멘트로 지은 32평 팔작지붕집이다. 목재와 전통기법으로 짖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 유물전시관 안에는 옥배(玉杯), 은배(銀杯), 친필편지 등이 보관되어 있다고 하지만 인연이 없는지 볼 수 없었다. 한창 개수공사가 한창이니 일정한 시간이 지나야 볼 수 잇을 것이다.

충의문을 지나니 위패가 모셔진 사당이다. 사당은 목조 맞배지붕집이고 사당 입구에는 정철의 공적을 적은 신도비가 있는데 귀부와 비신, 비개 모두 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목조기와집으로 된 비각이 홍살문 옆으로 세워져 있다.

사당 남쪽의 묘소 입구에는 대표적 가사를 적은 시비가 있으며 묘소에는 석물이 갖추어져 있다. 정철의 묘소는 송강사의 왼쪽 산에 있다. 사당 입구까지 내려와 가파른 산길을 오르면 말 안장처럼 느껴지는 용맥이 보이고 묘 2기가 보이는데 그중 뒤쪽의 묘가 송강의 묘이다. 좌우로는 잡목이 우거졌으나 뒤쪽으로는 송림이 우거졌다.

이미 가을이 지나간 뒤라서 바람이 불면 가지에 스치는 소리가 여간 날카롭지 않지만 뒤쪽으로 높게 자란 소나무 숲은 마치 사성처럼 둘러 쌓여 있다. 둥그스름한 주산이 험악하지 않아 좋다. 강하게 내려온 입수룡이 왕룡(旺龍)은 되지 못해도 강룡(强龍)은 된다.

송강의 묘는 흔하디 흔한 호석조차 없다. 그러나 묘는 제법 큰 편에 속한다. 문인석과 망주석만 갖추었는데 이끼가 끼어 세월을 느끼게 해준다.

묘비는 제법 육중하다. 살펴보니 “유명조선좌의정인성부원군 시문청호송강정공철지묘 정경부인 문화유씨부좌(有明朝鮮左議政寅城府院君 諡文淸號松江鄭公澈之墓 貞敬夫人 文化柳氏祔左)”라고 쓰여 있다.

송강 정철의 묘 앞에도 비슷한 묘제의 묘가 있는데 이는 강릉부사를 지낸 정종명의 묘역이다. 이 같은 묘제는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방식이다.
정철은 당대 가사문학의 대가로서 시조의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와 함께 한국 시가사상 쌍벽으로 일컬어진다. 창평(昌平)의 송강서원, 연일군의 오천서원(烏川書院) 별사(別祠)에 배향(配享)되었다. 문집으로《송강집》《송강가사》《송강별추록유사(松江別追錄遺詞)》, 작품으로 시조 70여 수가 전한다.

[강호(江湖)에 병이 깁퍼 죽림(竹林)의 누엇더니, 관동(關東) 팔백리에 방면(方面)을 맛디시니, 어와 성은(聖恩)이야 가디록 망극하다. 연추문(延秋門) 드리다라 경회남문(慶會南門) 바라보며, 하직(下直)고 물너나니 옥절(玉節)이 압패 셧다. 평구역(平邱驛) 말을 가라 흑수(黑水)로 도라드니, 섬강(蟾江)은 어듸메오 치악(雉岳)이 여긔로다. 소양강(昭陽江) 나린 믈이 어드러로 든단말고, 고신거국(孤臣去國)에 백발(白髮)도 하도할샤!]

묘역에 다다라 살펴보니 마치 소쿠리처럼 보이는 산의 모습이 완연하다. 송강의 묘는 그 소쿠리 같은 의 끝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기쁨을 안겨주는 산이라 해서 환희산이라 일컽는 이 산은 완만한 경사에 짧은 등산로로 산책하듯이 약 30분정도 올라가면 산의 정상으로 올라갈 수 있다. 송강의 묘는 등산로가 시작되는 왼쪽 능선에 자리하고 있다. 환희산은 산전 체를 정철선생의 유적 순례지 코스로 생각하면 좋다.

어은계석(漁隱溪石)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상산절경에 속하는 수려한 경치를 자랑하는 진천군 문백면의 절경을 의미하는 말로 문백면 봉죽리 송강 정철 묘가 있는 계곡으로 자연풍경이 수려하다. 평사낙안(平沙落雁)으로 알려진 강가와 함께 앞권이다.

평사낙안은 평산리를 찾아가는 길에 있는 문백면 평산리의 백사장으로 진천 삼대천(三大川)의합수지점으로 배사(白沙)가 10리를 뻗치고 기암경석이 맣고 기러기가 날아와 앉은 모습이 장관이었다고 한다.

우담제월(牛潭霽月)도 무시할 수 없는 경치를 지니고 있다. 평산리에서 약 2㎞ 하류인 문백면 은탄리에 큰 담호(潭湖)가 있어 봄, 여름에는 야유객들이 많이 찾아 온다. 우담에 비치는 달빛이 참으로 절경이다. 산태극 물태극으로 휘어져 있는 미호천 가에 자리잡은 모래사장과 그 주위가 연화부수형과 유사하나 결국은 국(局)을 이루지 못했다.

송강의 묘역에 오르니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환희산(歡喜山)에서 출발한 룡이 강룡(强龍)이 되어 내려온 맥이 커다란 당판을 만들었는데 전형적으로 우측이 부룩하고 좌측으로 기맥이 흐른 우선(右旋)이다.

전형적인 중락용의 형태를 이루었는데 당판이 급격히 기울어진 향태를 하고 있으며 뒤가 높아 좌대형에 속한다 할 것이다. 그러나 당판을 찾았으되 재혈에 문제가 있어 혈심을 취하지 못하고 내려 썼으니 애석타 할 것이다. 따라서 정종명의 묘는 전순 끝에 자리하고 있는 셈이다.

국세는 포근하며 안온하다. 내청룡이 짧다고 하나 내백호는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이고 내청룡과 내백호가 혈판을 두르고 있다. 겹치고 겹진 국세가 아름답기까지 하니 명당이라 할 것이나 재혈을 제대로 하지 못했으니 오로지 보는 이가 한숨을 지을 뿐이다.

 

안종선교수 블로그 http://blog.naver.com/sungbosung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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