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종선(교수)

충간공 남지(南智)선생의 묘소를 찾기는 애매하다. 그러나 한번 찾아가 보면 그 다음에는 비교적 찾기가 쉬운 지리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후학도 애초에는 사양리를 찾아가다가 길을 잘못 들어 남지선생의 묘역에 이르게 되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잘 된 일이라 할 것이다.

남지 선생의 묘는 진천군 문백면 평산리에 자리하고 있다.

진천에 사는 사람이라면 평산리를 찾기가 어렵지 않겠지만 외지인은 만만치 않다. 후학은 서울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증평에서 중부고속도로 나들목을 나섰다. 진천에서도 출발해도 좋지만 진천읍에서 헛갈리기 쉬운 길이라 증평에서 거슬러 올라가며 찾기로 했다.

증평에서 나들목을 나서 미호천을 따라 가면 편하겠으나 후학은 길을 잘못 들어 먼저 오창면으로 향했다. 오창면으로 가자면 중평 나들목을 나서 우회전 하여 약 7킬로미터 정도를 달리면 다다른다. 오창면에서는 도로 표지판을 따라 17번 국도를 따라 북상했다.

한참 다리다 보면 구도로로 나서게 되는데 도하리라는 지명을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도하리 부근에서 구도로로 내려서면 옥성리로 들어가는 길을 만나게 된다.

이 도로에서 옥성을 지나 산을 넘어가면 갈탄이라는 마을이 다다른다. 이 도로는 도로번호가 없지만 한참 달리다 보면 미호천 근처를 지나게 되므로 참고할 수 있다.

갈탄 마을에서 한참을 달리다 보면 고갯마루가 나오고 왼쪽으로는 남지선생의 묘소로 가는 길이라는 표지판이 보이고 직진은 초평의 진천농교로 가는 길이 나온다. 남지선생의 묘소 표시가 있는 길로 들어서 100여미터를 가면 평산리인데 평산리에 들어 가기 전 구릉 같은 산에 남지와 전의이씨의 묘가 있다.

남지의 묘는 지방기념물80호로 지정되어 있다. 1988. 9. 23일에 지방기념물로 지정된 남지의 묘는 문백리 평산리 산 18-1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남지(南智)공의 묘소이며 본관(本貫)은 의령(宜寧), 자(字)는 지숙(智叔)으로 영의정(領議政) 재(在)의 손자이다. 공은 17세 때 문벌(門閥)의 영향이 지대해 음보(蔭補)로 감찰(監察)이 되었고, 세종(世宗) 때 지평(持平), 장령(掌令)등을 거쳐 장단부사(長端府使), 개성유수(開城留守)가 되었으며 의성군(宜城君)에 습봉(襲封)되었다.

세종 17년(1435) 형조참판(刑曹參判)으로 성절사(星節使)가 되어 명(明)나라에 다녀와 대사헌(大司憲), 호조참판(戶曹參判), 강원도 관찰사(江原道 觀察使), 형조판서(刑曹判書), 호조판서(戶曹判書)를 지냈다.

세종 31년(1449) 우의정(右議政) 문종 1년(1451) 좌의정(左議政)이 되어 영의정 황보인(皇甫仁) 우의정(右議政) 김종서(金宗瑞)와 함께 단종(端宗)을 잘 보필해 달라는 문종(文宗)의 고명(顧命)을 받았으나 그해에 풍질(風疾)로 자리를 물러나 영중추원사(領中樞院事)로 있다가 얼마 안되어 별세(別世)하였다.

딸이 안평대군의 아들 이우직(李友直)에게 출가하여, 1453년(단종 1)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안평대군 부자가 화를 당할 때도 풍질로 인하여 화를 면하였다. 1489년(성종 20) 사후(死後) 손자 기(祈)의 상소로 충간(忠簡)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묘역 아래는 8대손인 약천(藥泉) 남구만(南九萬)이 쓴 높이 2.1m, 폭 0.75m의 신도비(神道碑)가 있다. 묘소는 윗쪽에 부인인 전의이씨의 묘소이며 아랫쪽이 남지의 묘소이다.

두 봉분 공히 사각형(四角形)의 대형 봉분(封墳)을 쌓은 사각묘(四角墓)로서 아래쪽에는 돌로 된 특이한 형식(形式)이다. 돌로 사방울 두른 사각형 형태의 묘제는 려말선초의 묘제이며 이 형태는 성석린 선생이나 남재의 묘소와 유사하다.

먼저 당판을 살펴보기로 하면 전의이씨의 묘역은 주산에서 길게 끌고 온 맥이 넓은 당판을 만들었는데 지나치게 넓어 판단이 쉽지 않다. 그러나 유의하여 살펴보면 전후좌우로 지각이 나와 있음을 알수 있고 넓게 퍼지기는 했지만 둥근 형태가 완연함을 알 수 있다. 비록 우선 하단의 지각이 보이지 않지만 오랜 세월 사람의 손을 탔다는 것을 감안하고 보면 돌혈의 형태가 완연하다.

흔히 사유에 지각이 완연하여야 돌혈로 인정을 받지만 지각이 3개라 할지라도 지각으로 뻗어나가는 기맥이 사유에 느껴지면 이는 돌혈이라 할 것이다. 아울러 오랜 세월 사람의 손을 타고 지형이 변경되었으며 인작(人作)이 가해진 것을 감안하면 능히 유출해 볼 수도 있다. 당판이 퍼진 것을 감안해도 훌륭하기 그지없는 당판임을 미루어 알 수 있다.

아랫쪽으로 남지선생의 묘역이 있다. 이 묘역 역시 넓게 퍼진 당판이 특징이라 할 것이다. 넓게 퍼진 당판은 때때로 혈심이 퍼져있거나 느껴지지 않느 경우가 있는데 남지 선생의 묘역에서 당판과 혈심은 명백하며 입수에서 좌우로 퍼져나간 지각이 보인다.

대자왈지각(大者曰地角)이라는 말이 실감나는 순간이다. 당판이 넓고 입수에서 선익이 크게 자라 좌우로 지각으로 내려갔으니 완연하게 힘이 느껴지는 것이다. 완벽한 유혈이라 할 것이며 그 넓은 당판으로 인해 후덕함이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안종선교수 블로그 http://blog.naver.com/sungbosungbo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저작권자 © 남양주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