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종선(교수)

소령원(昭寧園)은 제19대 숙종의 후궁이자 조선21대 영조(英祖) 어머니 숙빈최씨(淑嬪崔氏)의 원소(園所)이다. 숙빈 최씨는 최하층에서 최상층까지 올라간 입지전적인 여인이기도 하다. 2010년 tv에서는 그녀의 이름으로 각색한 사극 “동이”가 한창 인기를 끌고 있다. 물론 사극이라해서 반드시 사실은 아니다.

그녀의 원소는 사적 제358호로 지정되어 있으나 출입이 통제되고 있다. 파주시 광탄면 영장리 267에 자리하고 있는 길은 여러 가지가 있다. 서울에서 출발한다면 구파발이 시발점이다. 1번 도로를 타고 벽제3거리를 지나 39번 도로를 타고 이동한다. 벽제동에서 보광사로 가는 315번 도로를 이용할 수도 있다.

보광사 입구를 지나 약 5키로 정도의 거리에 소령원 입구가 있다. 큰 길에서 소령원 입구를 알리는 표지판을 통해 들어가면 곧 컨트리클럽으로 가는 길로 연결된다.

그러나 그전에 소령원 입그로 가는 길이 나타난다. 소령원으로 들어가는 길은 좁아 간혹 지나치는 경우가 있으나 찬기가 어려운 것은 아니다.

다른 길은 벽제3거리에서 혜음령을 넘어 용미리 석불과 윤관장군 묘를 지나 광탄면사무소로 간다. 78번 도로이다. 신산초등학교에서 작은 길로 들어서 고개 넘어 우회전을 하여 영장파출소 3거리에서 좌회전하고 1㎞정도 가다 능촌교 건너 숲에 소령원이 있다.

대중교통 이용시에는 불광동터미널에서 용미리를 거치는 332번과 보광사를 거치는 33번 광탄행 시외버스가 운행된다. 광화문에서는 서울역~불광동~벽제~용미리를 거쳐 광탄까지 이어지는 158-3번 시내버스가 운행된다.

소령원은 영장리 3거리에서 1.3㎞쯤 걸어 들어가야 한다.
사실 소령원에 가는 길은 찾기 어렵다. 국도 1호선 통일로에서 장흥 쪽으로 들어와 장흥유원지를 지나 말머리고개를 넘으면 양주시 기산리 저수지가 나타난다. 기산리 저수지에서 파주시 광탄면 영장리 방향으로 길을 따라 오다보면 우측에 차량 하나가 겨우 들어갈 다리 앞에 '소령원'이라는 작은 팻말이 붙어 있어 자칫 지나치기 일쑤다.

소령원은 일반인에게 개방이 제한되어 있다. 그러나 문화재 관리국이나 관리소에 이야기를 잘 하면 출입이 허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미개방 지역이기 때문에 대책 없이 찾아가면 둘러보지 못하는 수도 생긴다. 몇 번이나 찬아갔지만 헛걸음을 했었다. 그러나 몇 년 전에는 출입을 해서 살펴볼 수도 있었다. 2005년 8월 현재에는 미리 문화재관리국에 허가를 얻어 출입을 할 수 있었다.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영장리에 있는 10만여평의 숲이 우거진 소령원으로 들어서면 수백 년 된 침엽수의 청신한 향기가 느껴진다. 작은 수목원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는 풍광답게 짙은 녹색 공기가 코끝에 감돈다.

여름이라 잔디 작업과 배수로 작업이 한창이다. 허가를 얻어 들어가니 입구에서 숲길을 따라 한참을 오르면 널리 펼쳐진 잔디밭에 정자각이 보이고 그 위로 아름답게 다듬어진 묘역이 드러난다. 묘역의 전순을 따라 오르지 말고 측면의 소나무 숲을 따라 묘역에 올라 주위를 살펴본다.

묘역의 주인인 숙빈최씨는 최효원(崔孝元)의 딸로 1670년(현종 11) 11월6일 태어나 7세에 입궁하여 숙종의 후궁이 되었다. 숙빈 최씨는 무수리 출신이었다가 인현왕후가 폐출되었을 때 복위를 진심으로 기원하여 복위의 계기를 마련하였고 그 공으로 자신은 후궁에 오른 분이다

1694년(숙종 20) 9월 13일 창덕궁에서 영조를 낳았으며 1718년(숙종 44) 3월 19일 춘추 49세로 돌아가 그해 5월 12일 당시 양주 땅이었던 지금의 광탄면 영장리에 장사지냈다.

숙빈 최씨는 숙종 20년에 영조를 낳았으나 생전에 아들이 보좌에 오르는 것을 보지 못한 채 숙종 44년 49세로 서거하였다. 효성이 지극했던 영조는 보위에 오르자 모친의 죽음을 애통해 하며 숙빈 최씨의 묘를 소령원으로 추봉하면서 가까이에 있던 고령사를 원찰로 삼고 이름을 보광사로 고쳤다.

영조는 1725년 (영조 1) 어머니를 위해 육상묘(毓祥廟)를 건립해(현재 서울 종로구 궁정동 1-1 칠궁(七宮)) 어머니의 신판은 봉안하고 그 옆에 여막을 만들게 하였다. 처음에는 소령묘로 불렀으나 1753년 육상묘를 육상궁으로 개칭하면서 원으로 승격시켰다.

원역(園域)은 산기슭 중단부에 동향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봉분 뒷편에 담장을 설치하고 봉분의 양쪽으로 석호(石虎)․ 석양(石羊)을 각각 2필씩 배치하였다. 봉분 정면에는 비석, 상석, 향로석, 장명등이 일렬로 놓여 있고 그 좌우로 망주석, 문인석 석마(石馬)가 대칭으로 배열 되어 있다. 석물들이 전체적으로 간략한 형태를 띠고 있고 사각의 장명등 기둥과 석마(石馬 )의 다리사이가 막혀있는 점등으로 보아 조선후기 석물 형태를 살펴 볼 수 있다.

원소(園所) 아래 동북방으로는 비각 2동이 있으며 동쪽방향으로 중앙에 정자각(丁字閣)과 왼쪽에 수복방(守僕房)이 배치되어 있다. 수복방은 조선시대 원소중 소령원에만 유일하게 남아있다. 진입로 초입에는 숙빈최씨(淑嬪崔氏) 의 신도비가 보호각으로 보호되고 있다.

원역은 산기슭 중단부에 동향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봉분의 양쪽으로 석호, 석양을 각 2필씩 배치하였다. 봉분 정면에는 비석, 상석, 향로석, 장명등이 일렬로 놓여 있고 그 좌우로 망주석, 문인석, 석마가 대칭으로 배열되어 있다.

13개 원 중에서 가장 경관이 수려한 소령원은 1991년 사적 제358호로 지정됐다. 소령원(昭寧園)은 영조의 친모인 숙빈 최씨(1670~1718)가 잠든 곳이다. 가장 지체 낮은 궁녀인 무수리에서 숙종의 승은을 입어 연잉군을 낳아 빈까지 올라간 여인. 그리고 그 아들이 왕위에 올라 52년간이나 재위한 기록을 남겼으니 어찌 보면 조선 여인 중 가장 드라마틱한 수직 신분상승을 이룬 여인이다.

조선시대 궁궐에서 왕의 후궁이 될 수 있는 여인들은 거의 대부분 세도가의 양반 출신들이었다. 하찮은 무수리가 왕의 승은을 입는다는 것은 하늘의 별을 따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 여인이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이 왕위에 올랐으니……. 숙빈 최씨와 같은 경우는 조선조 500년 동안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최초의 방계 승통인 선조 이후 조선의 왕 중에는 어머니가 후궁인 방계 승통은 종종 있었지만 숙빈 최씨처럼 미천한 신분은 없었다. 영조는 어머니의 미천한 신분 때문에 어머니에게 더 극진하게 효도를 했을지도 모르겠다.

소령원은 영조의 효심이 깃든 곳이다. 13개 원(園) 중에서 유일하게 수복방이 남아 있는 곳으로 영조가 친필로 쓴 비석이 두 개 있어 어필을 감상할 수 있다. 영조는 어머니 최씨의 묘에 4개의 비를 세웠다. 정자각 동쪽에 있는 비각과 무덤 동편의 비각엔 1744년 영조가 친필로 쓴 비석이 있다.

관리사무소가 있는 뒤편 숲 속으로 들어가면 영조가 시묘살이 하던 99간 기와집의 주춧돌이 여기 저기 널려 있다. 주춧돌 옆으로 담장 일부가 남아 있어 지난 세월을 보여준다. 하지만 영조가 실제 시묘살이를 한 날은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아마 대부분 사람을 시켜 대신 하도록 했을 것이다.

숙빈 최씨의 무덤으로 올라가는 정자각 뒤편 길은 까마득해 보이는 언덕길이다. 200여m는 족히 넘어 보이는 구불구불한 잔디언덕 사초지가 신비감을 자아낸다. 2005년 8월, 마침 관리를 하느라 묘를 깎아 길이 더 잘 보였다. 누런 잔디는 마치 황룡이 꿈틀대는 듯하다. 관리를 맡고 잇는 소장님은 이미 어느정도 사람들의 왕래에 익숙하여 풍수인의 흉내를 내고 계시다.

"예전에 모 대학 사학답사반이 와서 이곳은 명당 중 명당이며 무덤자리가 황룡의 머리에 해당한다고 알려줬다"

이 소령원은 중국의 풍수지리지에 수록될 정도로 길지라고 한다. 명당자리니 만큼 이 묘를 두고 영조와 지관에 대한 갖가지 전설이 내려오기도 하지만 근거 없는 야사에 불과하다는 것이 정설이다.

숙빈 최씨가 죽은 것은 숙종이 살아 있을 때였는데도 영조대왕이 지관을 불러 시험했다는 둥, 재야에 묻힌 지관이 왕을 만나게 됐다는 둥의 허무맹랑한 전설이 꼬리를 물고 있다. 아울러 이 자리를 잡은 지사는 선비인데 왕에게 불려가 쥐의 숫자를 맞추었다는 전설도 흘러다니는데 믿기는 어렵지만 으레 그렇듯 조상의 묘를 확대하고 신격화 시키는 용도로 이해할 수 있겠다.

소령원은 2가지 설로 나뉜다. 대부분의 설은 완벽한 혈이라는 것이다. 그들의 주장은 묘역 뒤에 잉(孕)이 솟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잉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혈은 아닐 것이다. 아울러 잉은 형태가 부정확 할 수도 있고 혈이 아니라고 보면 잉이 아니라고 해도 무방하다 할 것이다.

일부 풍수 연구가들은 소령원이 혈이라는 사실에 반대를 하고 있다. 그 이유는 표면적이겠지만 기맥이 뭉치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외형적으로 당판이 있으나 설기(泄氣)된 전순도 혈이 아라고 주장한다. 모든 서적이 전순이 길면 양수양파(兩水兩破)는 설기의 증거로 본다고 적고 있다. 이 경우는 산진처에 해당하는 교과서적인 주장이다.

혹자는 무덤 뒤에 불룩 솟은 잉이 무덤보다 크다고 주장하지만 일부에서는 잉은 형태가 잉이지, 잉이 아닐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특히 소령원의 잉은 뭔가 의심이 든다고 하다. 어떤 주장이 맞는 것인지 사람을 엇갈리게 한다. 중요한 이론중의 하나는 전순(氈脣)이 지나치게 길면 혈이 결지될 수 없다는 것으로 이는 교과서적은 풍수지식이다. 많은 풍수사들 중 일부는 전순이 길다고 주장한다. 전순이 길면 이향(異鄕)하고 유리걸식(遊離乞食)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소령원, 최씨의 무덤에서 전순은 어디까지인가? 무엇이 전순인가? 풍수를 오래도록 배운 사람이라도 헛갈리지 않을 수 없는 모양이다. 당판을 받치는 전순이 길면 여기가 아니라 기맥이 흘러 혈이 결지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나 전순이 이미 끝나고 용맥이 진룡한 것이라면 전순이 아니라는 이야기가 되고 명당이라는 주장에 타탕성이 실리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중국의 지사들도 감탄했으며 한때 소령원의 무덤을 파헤치고 왕릉으로 조성하려했다는 이론도 성립된다.
과연 소령원의 전순은 어디까지인가?

안종선교수 블로그 http://blog.naver.com/sungbosung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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