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종선(교수)

오래전에 다녀본 길이라 해도 다기 가기에 어려운 길이 있다.

아마도 춘천 물로리와 같은 곳을 것이다. 준경묘도 오랜만에 가는 길인데 벌써 4년전에 다녀온 뒤라 기억이 아득하다. 사실 찾으려 한다면 어려운 일이 아닌데 삼척이라는 지명이 왠지 멀게만 느껴지는 이유를 모르겠다. 아마도 강원도 최동단이라는 지리상 위치가 멀게 느껴지는 모양이다.

이번에는 회원들을 모시고 출발했다. 하루에 다녀오기에 조금 먼 느낌이 들지만 오대산을 들르는 것보다는 나은 것이 사실이고 준경묘는 반드시 보아야 할 곳이기 때문에 회원들을 모시고 출발한 것이다.

중부고속도로를 타고 길을 서둘렀다. 호법에서 영동고속도로로 갈아타고 계속 달려 강릉에서 동해고속도로를 타고 동해시에 다다랐다.

동해 나들못에서 국도를 갈아타야 했다. 동해시에서 해변을 따라 남쪽으로 향하다 보면 태백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만나게 되는데 38번 도로이다.

삼척시에서 출발해도 결국은 38번 도로를 타야 준경묘에 이를 수가 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2002년 11월 15일에도 이곳을 지났다. 벌써 3년이 훌쩍 지나고 4년이 다가오고 있다. 그날을 생각하면 지금도 아득하다. 그날도 아침 일찍부터 출발했었다.

애초에 강원도 지방에 전날부터 눈이 와서 미시령이 통제를 당했다는 말에 당시 회원들이 망설였지만 대관령이 이미 오래전부터 터널공사로 인해 눈이 와도 과거와 같이 어렵지 않을 것이고 동해시 남쪽 방향으로 갈 것이라는 계획이었기 때문에 출발하기로 했었다.

그때도 중부고속도로를 타고 달리다 호법 인터체인지에서 영동고속도로로 변경했다. 영동고속도로를 따라 마음껏 달렸다. 그날은 금요일이었고 이른 시간에 출발해서인지 차도 많지 않았다. 3시간이 걸리지 않아 강릉을 지나 동해에 도착했었다.

준경묘는 삼척에 자리잡고 있다. 쉬지 않고 삼척방향으로 달렸고 해안이 보이는 도로가 나타나기도 했다. 삼척시내에서 58번국도, 즉 태백으로 향하는 도로를 따라 달렸다. 2001년 여름에 엄청난 수해를 당했다더니 당시 길이 엉망이었다. 곳곳이 패이고 다리는 끊어졌다. 여기저기에서 공사가 한창이었다. 한숨이 절로 났던 기얷이 있다.

이번에도 같은 길이다. 동해에서 태백 쪽으로 가다보면 환선굴에 이르기 전에 오른편에 계속해서 영경묘, 준경묘 입구임을 알리는 이정표를 만난다. 영경묘라는 표지판을 보고 달린지 5분여가 지나자 멀리 준경묘로 들어가는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강원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 산149
준경묘는 조선 태조 이성계의 5대조 이양무(陽茂) 장군의 묘이고, 영경묘는 그의 부인 평창 이씨의 묘이다.

이곳이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이다. 준경묘를 알리는 마을 입구에 차를 세우고 걸어올라가기로 했다. 차를 이용해 올라갈 수 있도록 시멘트로 포장을 했지만 비가 많이 온 덕으로 차가 통행하기는 위험했다. 곳곳에 흙이 무너져 있기도 하고 나무가 막혀 있기도 했으니...... 과거에도 이 시멘트 길을 걸어 올랐었다.

처음부터 가파른 산길을 올라가야 했다. 덕분에 땀도 나고 구경도 할 수 있었다. 힘이 들기는 하지만 자연과도 호흡할 수 있는 기회였다. 처음부터 가파른 산길을 만나 시멘트 포장이 깔려있는 구불구불한 길을 20여분 가까이 힘을 들이며 산을 넘었다.

산을 하나 넘자 그 다음부터는 계곡을 따라 오르는 길이다. 아무튼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준경묘까지는 15분에서 20분 정도의 가파른 시멘트 길을 오르고, 다시 15분간 평평한 흙길과 내리막길을 걸어야 도달한다. 시멘트 길을 올라 계곡을 따라 걸으면 길이 그다지 어렵지 않고 주위로 소나무들이 빽빽하다.

묘 앞에 50m정도의 소나무 숲길이 열려있다. 그 중에는 정이품송과 결혼한 소나무도 있다고 한다. 도중에 이야기를 듣고 나무 앞에 세워진 안내판을 보니 이곳엔 지난 2001년 한국 제일의 미송(美松)으로 뽑혀 충북 보은의 천연기념물 제103호 정이품송을 신랑으로 맞아 소나무 전통혼례식을 가진 신부 소나무가 있다.

화려한 볼거리는 없지만, 바람과 소나무의 협연이 상쾌하다. 희미한 물소리가 들리고 있고 한참을 걸어 계곡을 올라가자 양 옆으로 말의 귀처럼 보이는 두개의 산 사이로 묘역이 드러난다.

드디어 준경묘(濬慶墓)!
조선 태조 5대조의 묘로, 묘지를 에워싸고 있는 소나무 숲이 울창하다. 태조 4대조인 목조가 아버지를 이곳에 묻은 후, 한 도승의 예언대로 태조가 조선을 건국하게 됐다는 전설이 있다.

준경묘 일대에는 울창한 송림이 원시림 상태로 우거져 있는데 특히 이곳 송림은 `황장목`이라 하며, 경복궁 중수 때 자재로 사용하였다. 준경묘 근처에는 조상의 현몽으로 마련되었다는 샘물이 있는데, 이 물을 마시면 새로운 활력과 영험을 얻는다고 전해진다.

이태조의 증조부가 백우금관으로 산신령께 제향하고 얻었다는 천하길지!
묘소의 입구에는 보기 드물게 훌륭히 자란 적송이 운치를 더하고 심산의 고지에서도 관평한 세를 이루어 소취처에 대명당임을 한 눈에 읽을 수 있었다.

부푼 가슴으로 흥분되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입구에 들어서는 데 준경묘에 대한 푯말이 서 있었다. 푯말에는 백우금관 으로 장례했다는 일화를 덧붙여 놓았는데, 내 눈에는 유독히 그 문장만이 크게 보일 뿐이었다.

백우금관의 얘기인즉,<이태조의 증조부는 기이하게도 어느 노승의 인연으로 천하길지를 알았으나 막상 장례를 치르려니 산신령께서 꿈속에 나타나, "산신령한테는 백 마리의 소를 제물로 바치고 또한 이 혈장에는 금으로 만든 관으로 하관하여 장사지내야 한다."는 계시를 받고 몹시 근심에 쌓인다.

여러날을 고민에 근심을 쌓던 그는 급기야 기발한 생각을 해 낸다.그렇다! 백 마리의 소는 흰털을 지닌 소로 하고 황금은 누른색이라 관을 밀짚으로 둘러 황금관을 만들자. 생각이 여기에 미친 그는 곧 실행에 옮기는 대범한 기지를 갖는다. 결국 백우(百牛)를 백우(白牛)로 제향하고 금관을 누런 밀짚관으로 하여 무사히 안장하였다는 것이다

묘역을 바라보니 홍살문 뒤로 왕룡으로 내려온 맥 위에 손톰 모양의 혈처가 있다. 묘가 앉은 자리가 마치 손톱의 흰 부분처럼 위치하고 있어 묘한 감흥을 준다. 그리고 묘역 앞으로 돌을 쌓았고 그 돌 사이에 애초부터 박혀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돌들이 보인다. 우측으로도 돌이 적지 않게 박혀 있다.

드디어 묘역에 오른다.
이양무의 아들 안사(安社)는 전주에서 살다가 백성을 괴롭히는 관원과의 불화로 삼척으로 옮겨와 살게 되었는데, 그러던 어느 날 산에 올랐다가 피곤하여 풀숲에 누워 바람을 쐬고 있던 차에, 마침 근처 산길을 지나가던 고승과 동자승의 대화를 우연히 듣게 되었다.

고승이 동자에게 하는 말이 `이 자리에 묘를 쓰면 5대 후손이 왕이 될 것이라.` 하니, 이 말을 듣고 귀가 번쩍 뜨인 그는 스님에게 달려가서 자세히 물었다. 스님은, "이 자리는 천하의 명당이라, 묘를 쓰되 말 백마리를 잡아 제물로 하고, 황금으로 만들어진 관을 쓰면 5대 후손이 왕이 될 수 있는 자리다." 라고 일러 주었다.

이 말을 듣고 그는 고민에 빠졌다.
욕심은 나는데 돈이 없으니……
어려운 살림에 어디 가서 황금관을 준비하며, 말 백마리를 살 것인가……

고민만 하던 중, 어느 날 꿈속에서 한 동자를 만난다. 동자가 말하기를 "걱정하지 말라, 들판에 나가 보면 황금을 얻을 수 있을 것이요, 장에 나가 보면 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믿기지는 않았지만 아침 일찍 일어나 들판에 나가 보았다. 그러나 어디에도 황금은 없었다.

실망스러워 돌아서려던 그의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으니, 때는 가을이라, 익을 대로 익어 수확만 기다리며 들판에 넘실대는 벼의 황금빛 물결이었다. 그렇구나, 저것이 황금이로구나, 그는 무릎을 쳤다.

다음으로 장에 나가 보았더니, 말을 팔려고 나온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 중에 하얀 말을 팔려고 나온 사람이 있었다.

이안사는 그렇게 답을 내리고 부모를 안장하였는데, 관은 볏짚으로 싸서 황금관에 준하여 사용하고, 百馬를 白馬로 해석하여, 흰말(白馬)을 잡아 제를 올렸다. 그렇게 준경묘가 마련되었으며, 마침내 5대손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였다고 전해진다.

속설로 전하는 바에 의하면, 조선왕조에 그렇게도 많은 시련과 풍파가 이어졌던 사유가 바로 제대로 황금관에 백마리의 말로써 제를 올리지 않고, 편법으로 무덤을 썼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아울러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지역 일각에 구전되는 이야기에 불과하며, 도승의 예언대로 목조(穆祖;李安社/이성계의 고조부)가 백우금관(百牛金棺)에 부모를 안장한 이후 5대손에 이르러 조선(朝鮮)을 창업하게 되었다는 전설이 정설로 전해진다.

이 묘소는 전주이씨 실묘로는 남한 최고의 시조묘이며 해마다 4월 20일 전주 李氏 문중 주관으로 제례를 지낸다. 이묘는 1981년 8월 5일 강원도기념물 제43호로 지정되었으며 조선 태조의 5대조이며 목조의 부 양무의 묘이다.

1899년 목조의 모친인 이씨의 묘인 영경묘와 같이 묘소를 수축하여 제각, 비각을 건축하고 준경묘라 하였다. 준경묘 일대는 울창한 송림으로 되어있어 원시림의 장관을 구경할 수 있는 곳이며 준경묘의 무덤 묘제는 이후 조선왕조 임금들 왕릉의 전범이 되었다.

준경묘는 태조 이성계의 5대조인 이양무의 묘다. 태조 이성계의 족보는 용비어천가에 나오는 대로 목조-익조-탁조-환조-태조 순이다. 그런데 탁조는 도조(度祖)인데 도조라고 읽지 않고 탁조로 읽는다. 전주이씨 종친회에서 확인했으니 틀림없다.

용비어천가에 보면 전주이씨 일가가 전주에서 삼척을 거처 함흥으로 갔다고 나오는데 그 흔적이 바로 준경묘, 영경묘인 셈이다. 준경모는 대단한 역사적 가치가 있는 유적은 아니지만 꼭 한번 가볼만한 곳이니다. 대한민국 제일의 소나무 군락지를 볼 수 있다.

하나같이 수령 600여년 된 소나무들이 하늘을 찌를 듯 수백, 혹은 수천그루가 있는데 아마 조선왕조 설립 직후 인공조림된 것이 아닌가 싶다. 흔히 보는 구불구불한 소나무들이 아니라 전봇대모냥 아주 곧은 소나무들로 얼핏 봐도 높이 20-30미터에 굵기도 지름 1미터 내외정도이다.매년 한식 때면 전주이씨 종친회에서 주도해 제사를 지낸다. 전국에서 전주이씨들이 구름같이 모여든다.

일행은 묘역에 올라 먼저 주포에 향피워 예를 올리고 나경을 하침하여 좌향을 분별하고 수구를 格定하고 내룡을 格針하였다.

묘를 파악해 보니 왕룡으로 내려온 것이 분명하며 언뜻 보아서는 묘가 앞으로 치우친 듯하다. 기맥을 측정하고 주변의 암석을 조사했다. 과연 묘는 혈심을 약간 벗어나 앞으로 치우쳐져 있었다. 그러나 수맥에 걸릴 정도는 아니었고 내훈에 들어간 것은 확인된다.

귀석에 전순과 당판에 있으니 중자와 말자가 출세하거나 세도할 것으로 파악되었으며 언뜻 보기에는 해목혈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해목혈(蟹目穴)로 보아도 묘는 정확한 형심 앞으로 밀려나가 자리잡았다.

특히 앞쪽의 높은 두 개의 산, 즉 청룡 끝에 자리한 높은 산과 백호자락 끝의 높은 산은 천을 태을을 구성하고 있으며 아울러 말자의 세도를 짐작하게 한다.

용맥을 살피면 준경묘가 있는 곳은 백두대간의 한 봉우리인 오대산(五臺山)에서 두타산(頭陀山)을 거쳐온 내룡이다 특히 준경묘는 룡은 웅장한데 혈은 비교적 초라하여 이런 자리를 룡장혈졸(龍壯穴拙)이라 하기도 하는데 형으로 된 자리가 아니라 기세(氣勢로 된 자리다.

여기서 형이란 혈을 말하며 세란 룡을 말한다. 즉 준경묘를 결지한 용맥은 대단히 강한 왕룡(旺龍)임을 말하는 것이다. 룡과 혈의 구분은 태조산(太祖山)에서 입수(入首)까지는 룡에 속하며 입수에 연결된 당판은 혈에 속한다. 따라서 준경묘는 왕성한 기맥으로 인해 이루어진 것이라 할 것이다.

혹자는 준경묘가 높고 깊은 산중 분지(盆地)에 있으며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탓으로 와혈판(窩穴坂)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와혈판은 아니다. 지금도 준경묘를 와혈판으로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데 후학이 배우 고 수많은 책을 보아온 결과에 으히면 와혈판은 반드시 횡룡입수를 이루고 귀성이 받쳐주어야만 한다. 그러나 준경묘는 와혈과 거리가 멀다. 차라리 유혈이라는 말이 정확하다 할 것이다.

흔히 와혈판이라고 주장하는 이론적 근거는 혈판이 목성(木星)이라는 것이다. 즉 나무는 원래 곧게 서있는 성질이 있는데, 도지목성(倒地木星)이란 나무가 땅에 닿아있음이니 누워 있는 나무를 말한다고 한다. 도지목(倒地木)이면 입수처(入首處)가 뿌리부분이 되고 혈장(穴場)이 나무의 윗부분인 나무가지에 해당한다고 한다.

혈장이 넓어서 혈장부분이 뿌리처럼 보이는 수도 있지만 혈은 열매에 해당하므로 뿌리에 혈이 맺을 수 없다. 따라서 혈장이 가지에 해당한다. 하기는 준경묘를 자세히 보면 입수처가 넓고 점점 좁아졌으며 혈장만 넓은 것을 알 수 있다. 혈장을 살피자면 정확한 유혈이 되었다.

앞에 보이는 봉우리는 언뜻 보면 하나씩만 보이는 것 같지만 기봉된어 용수(聳秀)한 봉우리가 청룡 백호 쪽에 각 한개씩 솟아있다. 이 모양을 가지고 잡다하게 설명할 수 있겠으나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두개의 봉우리가 크기와 솟은 높이, 그리고 기의 세기가 비슷하다는 것이다.

바로 천을 태을이다. 흔히 용호가 위에 것이 낮고 밑에 것이 높이 솟은 형태를 역(逆)이라 하며, 준경묘의 경우 청룡백호 양쪽 다 역으로 보기도 한다. 역은 남에게 배신당하기도 하지만 자신도 배신한다고 한다.

결과론 적인 이야기지만 일부 풍수가들은 이 모습을 보고 이태조가 자신이 배신하여 역성혁명(易姓革命)을 일으키고 자신도 또한 아들로부터 배신당한 이유를 준경묘의 청룡백호가 암시하고 있다고 말한다.

안종선교수 블로그 http://blog.naver.com/sungbosung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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