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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보의 풍수여행-34 '기림사에서 만나는 명당의 조건'
2014년 07월 08일 (화) 09:55:29 안종선 sungbosungbo@naver.com

   
▲ 안종선(교수)
경주에 온 이상 그냥 돌아갈 수는 없는 일. 경상북도 경주시(慶州市) 양북면(陽北面) 호암리(虎巖里) 함월산(含月山) 기슭에 있는 기림사를 찾아 나섰다. 기림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인 불국사의 말사이다. 과거에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1교구가 기림사에 있었다.

동해에서 떠오르는 '해'를 삼켰다 토했다는 형국의 산세라는 경주의 토함산 그와 나란히 놓인 함월산도 '달'을 먹었다가 토했다는 산세라고 전해진다. 그 함월산 중턱에 있는 선찰(禪刹) 기림사.

643년(선덕여왕 12) 천축국(天竺國)의 승려 광유(光有)가 창건하여 임정사(林井寺)라 부르던 것을, 뒤에 원효(元曉)가 중창하여 머무르면서 기림사로 개칭하였다고 한다. 기림사란 부처님 생존 때에 세워졌던 인도의 기원정사(祇園精舍)를 뜻한다.

1862년 대화재로 113칸의 당우가 불탔으나 가을에 복원하였으며, 그 뒤 78년의 중수를 거쳐, 1905년에는 혜훈(慧訓)이 다시 중수하였다. 문화재로는 보물 제415호로 지정된 건칠보살좌상과 보물 제833호로 지정된 대적광전(大寂光殿)이 있으며 목탑지(木塔址), 석조치미, 문적(文籍) 등이 있다. 그 밖에 오정수(五井水)가 유명하였다고 한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생전에 제자들과 함께 수행했던 승원 중에서 첫 손에 꼽히는 것이 기원정사와 죽림정사이다. 특히 기원정사는 깨달음을 얻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23번의 하안거를 보내신 곳이다. 그 기원정사의 숲을 기림(祇林)이라 하니 경주 함월산 기림사는 그런 연유에서 붙인 이름이다.

경주 보문단지에서 감포로 가는 길이 4번 도로이다. 이 도로를 타고 출발한다. 보문단지에서 보문호와 덕동호를 지나면 2000년 초기에 만들어진 신도로를 타고 추령터널을 지난다. 추령터널을 지나 계속해 감포 방향으로 향하면 좌측으로 갈라지는 2차선 도로를 만나게 되는데 14번 도로이다. 14번 도로는 경주시 양북면 안동리에서 갈라지는데 오천방향으로 가는 길이다.

이 14번 도로로 갈라지는 길에 기림사라는 간판이 서 있으며 옆에는 골굴사에 이르는 간판도 서 있다. 이 간판을 따라 약 4키로 정도를 들어가면 막다른 곳에 기림사가 자리하고 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면 대나무 울울창창 우거진 곳에 작은 부도탑이 보이고 그 옆으로 새로 세운 일주문이 있다. 일주문과 기림사는 아주 가까운 곳에 자리하고 있다. 불과 5분을 걷지 않아 금강문을 지나게 된다.
   

기림사에는 전해 내려오는 창건설화가 있다.
먼 옛날 범마라국 임정사에 오십 년간 수도하면서 천안통과 숙명통 그리고 타심통을 얻은 도인 광유성인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스님은 제자들을 모아놓고 자신의 전생이야기를 했다.

"내가 전생의 부처님의 제자로 공부를 하고 있을 때에, 파사익 왕의 세 시녀는 늘 꿀물과 우유로 부처님과 제자들을 공양 올렸다. 제자들 중에는 인물이 출중한 스님이 한 분 계셨는데, 시녀들은 부처님 다음으로 공양하다가 그만 공경이 사랑으로 변해 시기하고 질투하게 되었다.

스님은 여인들의 유혹을 제도하려 하였으나 여의치 않자 산 속으로 들어 가 버리셨다. 그러나 스님은 아름답고 상냥한 세 여인을 잊지 못해 번민하다가 결국 도를 이루지 못한 채 입적하고 말았다. 나는 그때 그 스님의 도반으로서 먼저 도를 이루는 사람이 제도키로 약속을 했었다.

내 이제 금생에 인연이 얼마 남지 않았으므로 도반인 그 스님과 세 시녀를 제도하려 하니 나와 숙세로부터 인연이 있는 이들을 누가 이곳으로 안내하겠느냐?"

그때 승열 스님이 말했다.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스승이시여!"
"오 장하구나, 너는 아라한과를 얻었으니 능히 할 수 있으리라. 그 스님은 금생의'수다라'라는 대국의 왕이고 왕후와 후궁은 전생의 시녀이니라."
"그럼 한 명의 시녀는 어디에 있습니까?"
"이제 곧 왕의 아들로 태어나 스스로 여기로 올 것이니라. 수다라 왕국은 아직도 불법이전해지지 않았으므로 세 명을 한 번에 모셔오기 어려울 테니, 먼저 후궁인 월해부인을 인도토록 하여라"

승열 스님이 수다라국에 도착했을 때, 왕은 마침 500궁녀를 데리고 강가를 거닐다가 숲속에서 잠이 들었다. 산책을 즐기던 궁녀들은 좌선에 든 스님을 발견하고는 이상한 모습에 의아한 눈길을 주고받다가 가까이 다가와서 물었다.

"어디서 오신 누구신지요?"
"나는 범마라국 임정사에서 온 승려입니다."

스님은 궁녀에게 스님은 무엇을 하는 사람이며 불법이 무엇인지를 설명해주었다. 이때 잠에서 깨어 이를 목격한 왕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소리쳤다.

"너는 누군데 나의 궁녀를 꼬이느냐? "
왕은 승렬 스님의 목에 칼을 대고는 인생의 참 진리가 무언지 알려주겠다며 불개미 집을 헐어서 스님의 몸에 풀어놓았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불개미는 스님의 몸을 물지 않고 모두 흩어져버렸다.

이것을 본 왕은 크게 놀라면서 예사로운 분이 아닌 줄 알고 스님을 궁중으로 정중히 모셨다. 승열 스님은 1년간 궁중에 살면서 왕과 왕비 그리고 후궁들을 교화하였으며 수다라 왕국의 최초의 절 범승사를 세웠다. 그리고는 며칠 후 승열 스님은 왕에게 말했다.
   

"이제 그만 임정사로 돌아가야겠습니다."
왕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스님은 떠날 차비를 하면서 월해부인을 모시러 온 뜻을 밝혔다. 왕은 보내기 아쉬웠으나 월해부인이 선뜻 나서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 후 월해부인은 광유성인의 제자가 되어 물 긷고 차를 다리며 열심히 정진하였다. 어느 날 광유스님은 승열 비구에게 다시 수다라국에 가서 왕과 왕비를 모셔 오도록 했다.

승열 스님이 수다라국에 도착하니, 왕과 왕비는 물론 지난번에 귀의한 십여명의 제자와 신도 및 백성들까지 영접하였다.

"월해부인은 대왕이 오셔서 함께 공부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왕이 도착하기도 전에 도를 얻고 사바의 인연을 마칠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왕은 기가 막힌 듯 슬피 탄식했다.
"오, 참으로 세상은 허망하군요. 대왕이시여! 이 세상에서 참으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선지식이시여, 저를 깨우쳐 주소서!"
"그것은 일체를 소유할 수도 버릴 수도 없는 자신을 아는 일이지요."

승열스님은 자상한 설법과 함께 왕의 전생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왕은 참회하면서 왕비인 원앙부인과 함께 광유성인에게 가서 공부하기로 결심하고 왕위를 태자에게 물려 준 뒤 임정사로 향해 길을 떠났다. 만삭의 몸으로 길을 떠난 원앙부인은 중도에서 지칠대로 지쳐 더 이상 걸을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부인 힘을 내구려. 나와 함께 도를 이루자고 하지 않았소."

"대왕이시여! 저는 전생에 숙업인 듯 하옵니다. 저를 여기서 종으로 팔아 그 대가를 임정사 부처님께 올려 다음 생에 다시 공부하도록 빌어주십시오. 저의 마지막 소원입니다."

왕은 눈물을 흘리며 죽림국의 한 부자에게 만삭이 된 부인을 팔았다.
"대왕이시여! 아기를 나으면 이름을 무엇이라고 지을까요?"
"아들이거든 안락국이라 하고 딸을 나으면 아량이라 하여주오."

가슴이 터질 듯 아프고 슬픈 마음으로 부인과 작별한 왕은 광유성인의 제자가 되어 차 시봉을 하면서 세속 일을 잊고 정진에 몰두하였다. 그렇게 7년이 되던 어느 날, 임정사로 한 남자아이가 아버지를 찾아왔다. 그는 원앙부인이 낳은 태자 안락국이었으니 바로 전생의 한 시녀이기도 하다. 반갑게 상봉한 부자는 공부하며 함께 지냈다.

수다라 왕이 도를 얻어 열반에 들자 광유스님이 안락국에게 전생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안락국아! 너는 인연 있는 곳을 찾아 가서 중생을 교화하고 제도하거라. 그 인연지는 여기서 이백오십만리 떨어진 해동국으로 그곳에는 문수보살이 부처님의 부촉을 받고 계신 곳이다. 가서는 거북이가 물 마시는 형상을 하고 있는 산을 찾거라. 동해바다의 기운을 들여 마시는 용이 사는 연못이 있고, 탑의 형상을 갖춘 남쪽 돌산에는 '옥정'이라는 우물이 있으니 그 물을 먹으면서 수도하거라. 북쪽에는 설산을 닮은 돌 빛이 흰 산이 있으니 그 산 굴 속에 부처님을 조성하여 모시거라."

그리하여 해동 계림국에 도착한 안락국은 명당을 찾아 조그만 암자를 세워, 이름을 칭하되 '임정사'라 하였다.

절이 창건된 지 백오십년 후 신라의 '원효대사'가 절을 확장하고, 이름을 부처님 당시의 최초의 절인 '기원정사'의 이름을 따서 현재의 '기림사'라 개명하였다.

가람은 크게 세 구역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비로자나불을 모신 대적광전을 중심으로 왼쪽에 약사전, 맞은편에 진남루, 오른쪽으로 응진전, 수령이 500년 넘는다는 큰 보리수나무와 목탑터가 있다.

둘째는 최근 불사한 삼천불전을 비롯하여 명부전, 관음전, 삼성각과 요사채등이 있는 곳이다.
   

셋째는 유물관과 함월전시관이 있고 그 옆에 매월당 김시습 사당을 볼 수 있다. 가장 먼저 보이는 당우는 종루이다. 종루를 지나면 진남루가 앞을 가린다. 진남루는 매우큰 건물이다. 진남루는 남방을 진압한다는 뜻으로 여기서 남방은 일본을 가리킨다.

임진왜란 당시 기림사는 전략요충지로서 경주지역 의병과 승병 활동의 중심 사원이었으며, 이 지역 다른 사원과 달리 피해를 거의 입지 않았다.

경주부 관아에 보관되어 있던 [영부안선생]이나 [호장안]등 수많은 문헌들은 당시 호장 최락에 의해 기림사로 옮겨져 잘 보관 된 결과 오늘날까지 전해지게 됐다. 이때 이 진남루는 승군의 지휘소로 사용되었던 건물이다. 건물 형태는 익공계 겹처마 맞배지붕으로 상부 구조 수법이 돋보이는 독특성을 지니고 있다.

기림사의 주불전은 대적광전이다. 대적광전은 기림사의 본전으로 신라 선덕여왕 때 처음 지어졌으며 그 뒤 8차례나 다시 지어졌다. 1997년 해체공사 때 종도리에서 4종의 묵서가 발견되었다. 이 묵서에 의하면 1629년에 제5차중수가 있었고, 1755년에 개조중수가 있었고, 1785년에 6차 중창이 있었으며, 1978년에 제7차 중수가 있었다.

최근 1997년에는 정부의 문화재 수리비용으로 제8차 완전 해체 수리가 이루어졌다. 건물은 정면 5칸 , 측면 3칸의 규모이며 배흘림기둥의 다포식 단층 맞배지붕이 단정하다. 겉모습은 본전 건물다운 웅장함을 갖추었으며, 내부는 넓고 화려하여 장엄한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다. 전면에는 모두 화려한 꽃창살 문을 달았는데 색이 바래 화려한 꽃창살 조각의 느낌이 포근히 전해진다. 넓은 전각 안은 장엄한 맞배식 건물의 특성이 그대로 드러나며, 단청이 퇴색하여 느낌이 더 고색창연하다.

대적광전(大寂光展)은 주불이 비로자나불을 모신 전각이다. 적(寂)은 번뇌를 멸한 고요한 진리의 세계, 니르바나의 세계를 말하며, 광(光)은 그 세계에서 나오는 참된 지혜가 온 우주를 찬란히 비춘다는 것을 말한다.

가운데 비로자나불 왼쪽에 노사나불 오른쪽에 석가모니불을 모셔 삼신불(三身佛)을 이루는데, 흙으로 빚은 이 세 불상은 손의 위치와 자세만 다를 뿐 표정과 모양이 거의 같고 옷 주름까지도 비슷하다. 상체는 장대하나 무릎은 빈약하게 느껴지며, 네모난 얼굴은 강인한 표정이 엿보인다.

적절한 두께로 주름을 세겨 넣은 옷자락 표현이 장대한 몸체에 잘 어울리는데, 왼쪽 무릎 위로 접어 올린 옷자락이 비로자나불만 살짝 한 겹 더 접혔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다만 삼존불일 경우에는 좌우 부처들이 두 손을 서로 대칭되게 한쪽씩 드는 것이 보통이나 이 노사나불과 석가모니불은 둘 다 오른손을 들고 있는 것이 색다르다.

1740년에 간행된 [기림사 사적]에서는 대적광전 내부에 흙으로 만든 삼세여래상을 봉안하였으며, 이 때의 증사가 은점산인이라고 밝히고 있다.

기림사는 많은 당우가 있고 당우는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대적광전 옆에 있는 약사전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52호이고 관음전은 문화재는 아니나 천수 천안 관세음보살님을 모신 전각이다. 천개의 손과 천개의 눈과 열 한 개의 얼굴을 하고 있다. 천(千)은 광대무변(廣大無邊)의 뜻을 나타낸다.

수없이 많은 중생의 고통소리를 보아야 하므로 그렇게 많은 눈이 필요하고, 수많은 중생을 손을 내밀어 구제해야 하므로 그렇게 많은 손이 필요하다는 것을 상징한다.

풍수적으로 파악하면 금강문에서 종루를 지나고 진남루를 지나 대적광전과 약사전, 그리고 관음전까지 하나의 당판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일주문을 지나 금강문을 지나기 전 굽어진 경사로에서 바라보면 당판의 전순이 눈ㅇ 보이는데 좁은 시냇물을 건너 반대편에서 보면 전순이 3개인 것을 알 수 있다. 즉 이 3개의 전순은 각기 뾰족한 꽃잎처럼 보이기도 하고 마치 어떤 짐승이 발을 뻗고 물을 마시는 모습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형상은 느끼기에 따라 이름 지을 수 있으니 혹여 금구하수형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금구하수형이라고 할 수 있는 당판에 당우들이 서 있는 형상이다.

즉 비로자나불을 모신 대적광전을 중심으로 왼쪽에 약사전, 맞은편에 진남루, 오른쪽으로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 214호 응진전, 수령이 500년 넘는다는 큰 보리수나무와 목탑터, 그리고 목탑터에 세워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05호 3층석탑이 있는 공간 전체가 하나의 당판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음택 기준으로 보는 형상으로 전형적인 혈심이 있다는 것이고 형상으로 보아 역시 온화한 기운이 흐르는 양택으로서도 적격이라 할 것이다.

관음전을 지나면 삼천불을 모시는 삼천불전과 삼성각, 명부전은 당판에 이르는 용맥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건물을 지으며 평탄화되어 기맥의 흔적은 찾아보기가 어렵다.

대적광전에서 고개를 돌려 바라보면 기림사의 주산은 둥근 형태를 지닌 금형산임을 알 수 있다. 금형산은 온화함을 주는 산체로 재산과 관계있고 대가람일수록 이처럼 유하고 둥근 금형채를 주산으로 삼는 경우가 많다. 이는 금형산이 보여주는 기운뿐 아니라 금형산은 대부분 박환이 잘 된 땅이고 대형 산이라 주변에 커다란 터가 나오기 쉽기 때문으로 본다. 즉 전형적인 양택지라는 의미이다.

기림사는 또 다섯 가지 맛을 내는 물로 유명하다. 오종수라고 불리는데 차를 끓여 마시면 맛이 으뜸이라는 감로수와 그냥 마셔도 마음이 편안하다는 화정수, 기골이 장대해진다는 장군수, 눈이 맑아진 다는 명안수, 물빛이 너무 좋아 까마귀가 쪼았다는 오탁수가 그것이다. 그러나 일제시대 장군이 태어날까 두려워 물길을 막아버렸다는 장군수를 제외하곤 다른 네곳은 지금도 각기 다른 물맛을 내며 물이 솟아나오고 있다. 천왕문 안의 오탁수만이 식수대의 형태를 갖추어 놓았고, 나머지는 눈에 잘 띄지는 않는다.

이렇듯 많은 유물이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은 기림사의 지리적 위치 때문이 아닌가 싶다. 기림사가 있는 함월산은 인적이 드문 깊은 산골로 전쟁이나 기타 재화를 면하기에 안성맞춤이기 때문이다. 기림사 주위로는 계곡물이 흐르고 있는데, 이 계곡을 따라 500m쯤 거슬러 오르면 두 암벽의 벌어진 틈새로 시원한 물줄기가 내려치는 용두연이 나서는데 이 폭포 부근이 야영이나 취사하기 알맞은 장소이며, 용두연과 기림사 중간쯤에 있는 선녀탕에서는 물놀이를 즐길 만하다.

용두연이라는 이름은 신문왕이 이곳에서 쉬다가 동해의 용에게 받은 옥대고리 하나를 냇물에 담그니 그것이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는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기림사는 풍수상 여러 가지 해석이 분분한데 풍수지리상으로 용이 날고 봉황이 춤추는 듯 봉우리가 둘린 함월산에 자리하고 있다고 한다. 한 마리의 영험한 거북이 물을 마신다는 형상인데 이는 영구음수형(靈龜飮水形)이라고 한다. 비슷한 형상으로 금구하수형(金龜下水形)이 있다. 말은 다르니 같은 형상을 의미한다. 그러나 지세의 영험함은 인정할 수 있으나 형상에 대해서는 이론이 있을 수 있다.

특히 금구하수나 영구음수형의 조건으로 앞쪽에 커다란 물이 있아여 하는데 이 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금구나 영구의 경우 두개의 지각이 니와 발의 형상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이 절터의 모습에서는 두개의 지각을 찾아보기 힘들다. 즉 우선의 방향으로 돌출된 지각을 인정한다고 해도 좌측은 물이 크게 휘돌아 지각을 만들지 못했다. 따라서 완벽한 금구하수형이나 영구음수형으로는 볼 수 없을지 모른다.

산세는 울산의 무룡산과 함월산이 만나 산의 기운이 머무는 곳으로 밖에서 기림사를 볼 수 없으나 기림사에서는 밖을 볼 수 있어 은거지로 적당한 위치이다.

'조양산'이라고도 한다. 아울러 안에서는 밖을 보고 밖에서는 안을 볼 수 없으니 전형적인 풍수의 조건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안종선교수 블로그 http://blog.naver.com/sungbosung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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