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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보의 풍수여행-28 '엄흥도 선생의 묘를 찾아'
2014년 04월 28일 (월) 08:51:34 안종선(교수) sungbosungbo@naver.com

   
▲ 안종선(교수)

단종에게 있어 만고의 충신이랄 수 있는 엄흥도의 묘는 영월군 영월읍 팔괴리에 자리하고 있다.

영월(寧越)은 강원도(江原道) 남부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본래 고구려(高句麗)의 내생군(奈生郡)인데 통일신라(統一新羅) 경덕왕(景德王)이 내성군(奈城郡)으로 고치고 고려(高麗) 초에 영월로 고쳐서 원주(原州)에 편입시켰다가 공민왕(恭愍王) 때 다시 군(郡)으로 승격하였다. 이후 조선(朝鮮) 숙종(肅宗) 때 부(府)로 승격하고 1895년(고종 32) 영월군(寧越郡)이 되었다.

영월 엄씨(寧越嚴氏)의 시조(始祖) 엄임의(嚴林義)는 한(漢)나라 시인(詩人) 부양(富陽 : 一名 嚴子 先生)의 후예이며 당(唐)나라 상국(相國) 화음(華陰)의 일족(一族)이다. 문헌(文獻)에 의하면 그는 당(唐)나라 현종(玄宗 : 제 6대 임금, 재위기간 : 712∼756)이 새로운 악장(樂章)을 만들어 이를 인근의 여러 나라에 전파하기 위해 보낸 파락사(波樂使)로, 신라(新羅)에 도래(東來)하였다가 본국(本國)에서 정변(政變)이 일어나자 돌아가지 않고 지금의 영월 땅인 내성군에 안주(安住)한 것이 우리나라 엄씨의 시원(始源)을 이루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고려조에 와서 그를 내성군(奈城郡)에 추봉(追封)하고 후손들에게 영월(寧越)을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하자, 후손들이 그 곳에 살면서 영월(寧越)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특히 엄씨의 관적지(貫籍地)인 영월읍 하송리(寧越邑下松里)에는 처음 엄시랑(嚴侍郞)이 정착하면서 손수 심었던 은행나무가 우리나에서 제일 크고 오래된 수령(樹齡)을 자랑하는 보수(寶樹)로 천연기념물 제 76호로 지정 되었으며, 신기하게도 이 은행나무는 경술국치(庚戌國恥) 때와 을유해방(乙酉解放) 시(時)에 동편의 큰 가지가 부러졌고, 6·25 동란시에는 북편의 큰 가지가 부러지는 등 국가의 대이변(大異變)이 있을 때마다 무언(無言)의 예시(豫示)가 있었다고 한다.

엄흥도는 영월 엄씨의 충절이다. 숙부(叔父)인 수양대군(首陽大君)에게 왕위(王位)를 빼앗기고 영월에 유폐되었던 단종(端宗)이 화(禍)를 당하고 왕의 명령에 의하여 시신이 강물에 던져져 옥체(玉體)가 둥둥 떠서 돌아다니다가 다시 돌아오곤 했는데 옥 같은 열 손가락이 수면에 떠 있었다. 그러나 누구든지 시신을 거두면 삼족(三族)을 멸한다는 어명(御命)에 아무도 손을 대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 영월호장(寧越戶長)이라는 미관말직(微官末職)에 있던 흥도(興道)가 관(棺)을 마련하여 자신의 선산(先山)에 장사 지내고 <좋은 일을 하고 화를 당하면 달게 받겠다.>는 말을 남긴 후 영남지방으로 피했다.

후환이 두려워 세인(世人)들이 감히 생각지도 못하는 일을 한 흥도의 충절은, 선조(宣祖)때 그의 영웅성이 재평가되어 후손을 찾아 장녀(漢禮)에게 호역(戶役)을 면해 주고 단종릉(端宗陵)인 노산묘(魯山墓)를 수호하게 하였으며, 현종(顯宗) 때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건의로 비로소 그 후손들이 세상에 나와 벼슬에 등용되었다. 

   

영조(英祖) 때 와서 정문(旌門)이 세워졌고, 공조 참판(工曹參判)에 추증, 순조(純祖) 때 자헌대부(資憲大夫)로 공조 판서(工曹判書)에 가자(加資) 되었으며 시호(諡號)가 충의(忠毅)로 내려져, 사육신(死六臣)과 더불어 영월 창절사(彰節詞)와 공주(公州) 동학사(東鶴寺) 숙모전(肅慕殿)에 배향(配享)되었다.

「위선피화(爲善被禍)는 오소감심(吾所甘心)」
엄흥도가 남긴 글이다. 그는 아들 3형제와 같이 남몰래 시신을 거두어 지금의 동을지산 장릉자리에 암장하고 뿔뿔이 흩어져 산 충의지사(忠義之士)이다. 때늦은 1726년 영조2년에 어명으로 엄흥도의 충절을 기리기 위한 정여각을 세웠으며, 1758년 영조 24년에 사육신 열(死六臣正列)에 배향(配享)하고 창절사에 봉안치제(奉安致祭)되었다.

1791년 정조 15년에 어명으로 장릉 충신단에 배향치제(配享致祭)되고 1833년 순조33년 때는 공조판서 (정2품)로 승직했고, 1877년 고종14년에 충의공(忠毅公)이란 시호(諡號)를 내렸다.고종임금의 교지(敎旨)는 다음과 같다.

증 자헌대부 공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贈 資憲大夫 工曺判書 兼 知義禁府使)
오 위도총부 도총관 엄흥도 (五 衛都摠府 都摠管 嚴興道)
시호 충의공자 (諡號 忠義公者 )

[자 규 시 ]
한 마리 원한 맺힌 새가 궁중에서 나온 뒤로
외로운 몸, 짝 없는 그림자가 푸른 산 속을 헤맨다.
밤이 가고 밤이 와도 잠을 못 이루고
해가 가고 해가 와도 한은 끝이 없구나
두견새 끊어진 새벽 뫼 부리에는 달빛만 희고
피를 뿌린 듯한 봄 골짜기에 지는 꽃만 붉구나
하늘은 귀머거리인가?
애달픈 이 하소연 어이 듣지 못하는지
어쩌다 수심 많은 이 사람의 귀만 홀로 밝는고!

이 시는 자규루에 새겨진 시로 단종이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지은 시이다. 그리고 충신 엄흥도는 이에 답하여 다음과 같은 차운시(次韻詩)를 지어서 단종에게 바쳤다.

한번 영월에 오시더니 환궁치 못하시옵고
드디어 흥도로 하여금 두려운 가운데 돌보시게 하였도다.
작은 벼슬아치 육순에 충성을 다하고자 하거늘
대왕은 17세의 운이 어찌 그리 궁하신지
높이 뜬 하늘에는 밤마다 마음의 별이 붉고
위태로운 땅에는 해마다 눈물비가 붉도다.
힘없는 벼슬아치 의를 붙들고 일어서서
홀로 능히 이 일을 왕께 말씀드리려 하노라.

애닯은 심정과 한을 담은 자규시와, 엄흥도의 시는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첩첩산중인 영월에서 유배생활을 한지 얼마 되지 않아 경상도 순흥에서 금성 대군과 부사 이보흠이 주도한 단종 복위 운동이 발각되었다.

이 때 신숙주와 정인지, 한명회 등은 단종과 금성 대군에게 사약을 내릴 것을 주청하였다. 이에 단종은 1457년 10월 24일 금부도사 왕방연이 가지고 온 사약을 받고 17세의 어린 나이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단종은 동강에 버려졌으나, 역적의 시신에 손을 대면 삼족을 멸한다는 위협 때문에 그 누구도 시신에 손을 대지 못하였다. 이 때 의협심이 강한 엄흥도는 날이 어두워지자, 아들 3형제와 함께 미리 준비한 관을 지게에 지고 단종의 시신을 염습하여 영월 엄씨들의 선산인 동을지산(冬乙旨山: 현재 장릉)에 몰래 매장하였다.
그가 단종의 시신을 장사지내려 할 때 주위 사람들은 후환을 두려워하여 간곡히 말렸으나, 불의(不義)와 의(義)를 구별할 줄 알고 의협심이 강한 엄흥도는 “옳은 일을 하다가 그 어떠한 화를 당해도 나는 달게 받겠다.(爲善被禍吾所甘心)”라는 말을 남기고 단종의 시신을거두었다.

이에 엄씨 문중에서는 그가 남긴 이 유훈(遺訓)을 이어 받아, 그의 충의정신을 높이 받들고 있다.

엄흥도는 단종의 시신을 염습하여 지게에 지고 영월 엄씨들의 선산으로 향하였다. 이 때가 음력 10월 하순이므로 동을지산의 푸른 다복솔 가지 위에는 이미 함박눈이 쌓였고 살을 에는 듯한 찬바람이 불어왔다.

엄흥도는 잠깐 쉴만한 장소를 찾고 있는데, 언덕 소나무 밑에 숨어있던 노루 한 마리가 사람들의 인기척에 놀라 달아나서 그 자리를 보니 눈이 녹아 있었다. 엄충신은 단종의 시신이 들어 있는 관을 그 곳에 놓은 채 땀을 닦으면서 긴 호흡을 하였다.

그는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더 깊은 골짜기로 들어가려고 했지만 관이 얹혀 있는 지게가 움직이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속으로 ‘아! 이곳이 명당인가 보구나.’ 라는 생각을 하면서 노루가 앉아 있던 그 자리에다 단종의 시신을 몰래 장사지냈다. 전형적인 신화의 한 장면이 생각나는 상황이다.

그 후 엄흥도는 단종이 입고 있던 옷을 가지고 계룡산 동학사를 찾아가 생육신 김시습과 함께 그곳에다 단을 쌓고 초혼을 부르며 제사를 올린 후 종적을 감추어버렸다. 지금도 공주 동학사 숙모전에는 엄흥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동강에 버려진 단종을 장사지낸 그의 후손들은 주위 사람들의 눈을 피하여 먼 곳으로 도망을 간 후 온갖 어려움과 고통을 견디면서 살아갔다.

   

그 후, 정조 때는 조정에서 엄흥도의 충성을 높이 사서 강원도 관찰사로 하여금 제물을 대주어 엄충신의 묘를 단장하고 제사를 모시도록 하였다. 현재 그의 묘는 영월읍 팔괴리(八溪里)에 있는데, 후손들에 의해서 잘 관리되고 있다.

단종이 승하한 지 200여 년이 지난 현종 9년(1668)에 참판 여필용(呂必容)이 엄흥도의 복호(復戶)를 주청했으며, 그 다음 해에는 송시열(宋時烈)의 건의로 그의 후손들을 등용하였고, 영조 34년(1758)에는 종2품 가선대부(嘉善大夫)인 공조참판(工曹參判)으로 추증하고 영조가 친히 제문을 내려 사육신과 함께 모시도록 하명하였다.

지금도 영월 창절사(彰節祠)와 장릉 경내의 충신각, 문경 의산서원(義山書院) 그리고 경북 문경시 산양면 위만리의 충절사에서는 엄 충신의 위패를 모시고 제향을 올리고 있다.

그리고 삼족지멸의 위협 속에서도 단종의 시신을 장사지낸 엄흥도를 기리기 위하여 영조 2년(1726)에 청주에 정려각이 건립되었고, 영조19년(1743)에는 엄흥도에게 공조 참의 벼슬과 제물을 함께 내렸다.

그 후, 엄 충신의 정려각은 영조 35년(1759)에 그의 고향인 영월로 옮겼으나,그 후, 세월이 흘러 정려각이 허물어지자 1970년에 지금의 위치인 장릉 화소 안으로 옮겨 세우고 그 앞에다 홍살문을 세웠다. 충의공 엄흥도의 충성과 업적은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하여 여러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또 삼족을 멸한다는 위협속에서도 올곧은 충의정신 하나로 단종을 장사지낸 엄충신이 세상을 떠난 후 나라에서는 그의 충성과 의로운 행동에 보답하기 위하여 큰 벼슬과 시호를 내렸다.

엄흥도의 묘를 찾기는 그다지 어렵지 않으나 길을 모르는 후학은 몇 번이나 시내를 돌아 고생을 했다. 사실 영월 이라는 도시가 그리 크지 않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다지 해맬 것도 없다.

제천 나들목에서 출발해 장릉에 들어서면 장릉 앞에 두 갈래 길이 있다. 이 두 갈래 길 모두 여월로 들어가는 길이다.

이 길중 청령포로 이어지는 오른쪽 길을 타는 것이 유리하다. 이 길은 어차피 동강교에서 만나게 되는데 그 전에 청령포와 팔괴리로 들어가는 길이 있다. 청령포 들어가는 길을 지나 가다보면 하송리이다.

하송리라는 이름보다는 서경대학 방향이 어울린다. 서경대학 건너편에는 평창강이 흘러 동강교 부근에서 동강과 합해지는데 이 강이 남한강이 된다.

이 평창강을 건너는 작은 다리가 있다. 이 다리를 건너 길을 바꾸지 말고 직진하여 1킬로 정도 계속 가면 팔괴리가 나오고 길에서 산으로 오르는 높은 계단을 만난다. 그 계단 건너 길 옆에는 엄충신에 대한 간단한 약력과 사진이 붙어있고 계단을 오르면 엄흥도의 묘이다.

또 다른 길은 팔괴리로 들어가는 길을 잘 찾지 못했을 경우이다. 영월을 지나고 동강교를 지나 영월화력발전소로 가는 길이 있다. 88번 도로인 이 도로는 고씨동굴로 가는 길인데 이 길 도중에 영월화력 방전소가 있다.

이 화력발전소 앞에 남한강을 건너는 시멘트 다리가 있다. 이 시멘트 다리를 건너 5키로 전도 달려 산을 넘으면 엄흥도의 묘를 만날 수 있다.

엄흥도의 묘는 전순이 매우 아름답다. 밑에서 보면 둥근 언덕을 올라가는 듯 느껴지는데 그 정도로 전순이 아름답다 할 것이다. 이 계단이 바로 전순에 자리하고 있다.

전순에 있는 계단을 오르면 엄흥도의 묘이다.
후학이 찾아간 때는 2003년 11월로 추위가 전차 다가오던 계절이었다. 막상 묘역을 찾아 오라가 보니 한숨이 나오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묘역으로 오르는 계단에 철근이 놓이고 새로이 계단을 깔고 있었다.

묘역의 성역화는 일찍이 시작된 것으로 알기 때문에 기분이 흡족했다. 어차피 문화재 차원은 물론이고 충신의 묘를 성역화 작업한다는 점은 기뿐 일이기 때문이다.

허나, 묘역에 오르는 순간은 정말로 화가 났다. 묘역 주위로 깊게 파여었을 뿐 아니라 묘역을 단장하려고 시멘트 타설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조상의이 묘를 시멘트로 콘크리트를 쳐서 두르겠다는 전근대적이고 근시안적인 발상을 한 자가 누구인지 참으로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결코 가문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묘역은 마구 파헤쳐지고 포크레인의 발자국이 남았다. 그나마 묘는 건들이지 않았다고는 하나 한심한 생각에 후학은 몇 번이나 분통을 터트려야 했다. 주변이 많이 파괴되기는 했지만 다행히 온전한 봉분이 있고 더 훼손 되기 전에 찾아온 것이 다행이었다.

묘는 용이 행하는 방향으로 조성되어 있었다. 형을 중요시 여기면 기맥을 따라 묘역을 조성하는 것이 원칙이나 이 경우는 약간의 세밀함이 필요하다.

묘역 가장 위쪽으로 올라가 묘를 앞에 두고 바라보니 우선 방향이 배가 부른 듯 느껴진다. 다가가 살펴보니 마치 혹이 달린 듯 부풀었으니 이는 역시 유혈이 아니라 잉육혈이다. 따라서 혈장은 엄흥도의 묘 위쪽에서 약간 우선으로 치우쳐야 하고 좌향도 달라져야 한다.

그렇다면 처음에 계단을 타고 오르며 본 전순은 어찌된 걸까? 이는 분명 엄흥도의 묘가 자리한 곳의 전순은 아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묘역이 지나치게 길어 유혈의 모습치고는 늘어진 듯한 모습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경우는 혈장이 어디에 있는지 다시 살펴야 한다. 현재의 모습으로 보아 엄흥도의 묘는 혈장에 정학하게 들지 못했으며 우측으로 이동해 잉혈의 혈장에 모셔져야 하고 아래쪽으로 하나의 혈장이 남아있음을 알 수 있다.

형상은 찾았으되 혈심을 찾지 못했으니 애석한 일이다. 다만 묘역 앞으로 흐르는 남한강이 횡대수를 이루었으니 풍수를 배우는 후학의 입장으로는 관산을 권한다.

울산에 가면 [증공조참판엄공원강서원비 (贈工曹參判 嚴公圓岡書院碑)]가 있다. 문화재자료 제10호로 지정된 이 비는 울산광역시 울주군 삼동면 둔기리726-1번지에 자리하고 있다. 이 비석은 엄흥도(嚴興道)의 충절을 기리는 원강서원(圓岡書院)의 묘정비(廟庭碑)이다.

1799년(정조 23년) 울산에 살고 있던 엄흥도의 후손들이 울주군 온산읍 대정리에 원강사(圓岡祠)를 세워 그의 제사를 받들었는데, 1817년(순조 17년)에 사림(士林)의 논의에 따라 이 사당이 원강서원으로 승격되었다. 1994년 원강서원을 삼동면 둔기리에 다시 세우면서 이 비석도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이 비석은 1820년(순조 20년)에 세운 것인데, 홍문관제학 조진관(趙鎭寬)이 엄흥도의 행적(行跡)을 찬술하고, 동부승지 이익회(李翊會)가 비문을 썼으며, 명필로 이름난 이조판서 이조원(李肇源)이 새겼기 때문에 미술사적 가치가 매우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단종의 애사를 생각할 때 엄흥도 뿐 아니라 추익환과 정사종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 모두 충신이기 때문이고 엄흥도와는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정사종은 나주 정씨로서 호는 야은(野隱)이다. 조선조 세종 때 봉선대부 전의감 부정(奉善大夫 典醫監 副正)정극실(丁克實)의 아들이다.

정사종은 영월 호장 엄흥도와 함께 단종의 시신을 거둔 충신이다. 무과에 급제한 후 세자(世子)를 시위(侍衛)하는 익위사(翊衛司) 익위(翊衛)를 거쳐 군위현감(軍威縣監)을 지내던 정사종은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영월로 유배되자 군위현감직을 사직하고 순흥(順興)에 유배된 금성대군을 찾아 단종 복위 운동을 도모했으나 실패했다.

그 뒤 영월에서 숨어 살던 정사종은 1457년 10월 24일 단종이 사약을 받고 승하하자 단종시신이 동강에 버려졌음을 알고 호장 엄흥도와 같이 단종의 시신을 거두어 암장하고 , 아들 중경(仲敬)에게 '너는 농촌으로 돌아가 이후 자손들과 나무나 하고 소를 기르며 살며, 공명은 구하지 말라(余歸田生以 子孫爲樵牧 不求功名)'는 유언을 남기고 청령포 깊은 물에 투신 자결했다.

안종선교수 블로그 http://blog.naver.com/sungbosung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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