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천암을 내려와 세심정 약수터에서 곡차를 마신다. 부침도 좋다. 기분 좋게 땀을 식히고는 태실을 찾아 나선다. 마음은 앞서지만 걱정이 태산이다.

누구도 태실을 알지 못하니 걱정이 없을 수 없다. 세심정 약수터 사장님이 길을 안다고 하는데 마침 집에 없단다. 그러나 세심정 약수터 앞에 그려진 약도

에는 가까운 곳에 있고 내가 가지고 있는 지도에도 대충 감안이 되니 찾아가보기로 했다.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1호로 지정된 순조대왕 태실은 충청북도 보은군 내속리면 사내리 산1-1번지에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주소만 가치고는 찾기가 힘든 곳이다. 만약 의심스러우면 세심정 약수터 주인에게 물어보면 알 수 있다.

세심정 약수터에서 좌측으로는 복첨암이고 우측으로는 비로봉으로 올라가는 길이다.

산이란 결국 오르면 산등에서 만나게 되지만 이처럼 길을 나누어 표시를 한 것은 찾기 수월하게 하고 짧은 거리를 알려줌이다. 세심정에서 비로봉 방향으로 약 200여미터를 가면 문장대로 오르는 길과 비로봉으로 가는 길이 갈리는 데 후학은 비로봉, 즉 상환암으로 오르는 길을 택했다.

세심정에서 20분이면 태봉에 다다른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았다. 나중에 세심정 주인에게 듣고, 태실에서 내려온 길을 찾아 알았지만 길이 따로 있었는데 아직은 길을 모르기 때문에 태봉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상환암으로 오르는 길을 한참을 오르다 생각하며 지도를 펴보니 방향적으로 오른쪽, 즉 지나친 것 같았다. 그리고 멀리 보이는 능선이 이어져 내려와 커다란 봉우리 하나를 만든 것 같았다. 오른쪽으로 다가가 살펴보니 작은 시냇물이 흐르고 바위가 줄어 오를 수 있을 것 같아 비탈을 내려 작은 계곡을 지나 무작정 산으로 올랐다.

과연, 5분 정도 오르자 산길이 있었다. 사람 하나 다니는 작은 산길인데 직감적으로 태봉으로 오르는 산길임을 알 수 있었다. 그 길을 따라 다시 3분 정도 오르자 T자형 길이 나타난다. 좌측으로는 아무래도 높은 산으로 오르는 길 같아 좌측으로 향했다.

사실 T자형 지점은 쑤욱 내려간 형상이었는데 다시 높아지는 산길을 한구비 넘자 바로 정상이고 태실이 보였다. 조금 전 만났던 T자형 지점은 이 산의 인후, 즉 과협이었던 것이다.
태봉, 혹은 태실이라 불리는 이 유적은 무엇인가?

왕실에서 태를 묻던 시설을 태실, 혹은 태봉이라 부른다. 태실과 태봉은 광의적으로 보아 동의어인데 협의적으로는 태실은 태를 묻는 시설만을 이야기 하는 경우가 있으나 태봉은 태실이 있는 산 전체를 의미하는 경우도 있다.

태실의 경우에는 보통 대석(臺石)·전석·우상석·개첨석 등으로 만들었다.
왕가에서 왕자나 공주, 옹주가 태어나면 태를 묻을 준비를 한다. 이는 대단히 중요한 일로 치부되었다. 관상감(觀象監)에서 태를 묻을 장소를 물색하고, 안태사(安胎使)를 정하여 묻게 하였다. 왕실의 태는 국운과 직접 관련이 있다고 여겨 소중하게 다루었는데, 관할구역의 관원은 봄과 가을에 태실을 돌아보고 이상유무를 확인한 뒤 보고하도록 되어 있고, 태실을 고의로 훼손하였을 경우 국법에 의하여 엄벌하였다.

조선시대에 왕의 묘는 도성에서 일정거리 밖을 벗어나지 못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전국적으로 왕묘에 버금가는 우수한 명당이 발견되었거나, 그 명당을 이용해 왕권을 위협하는 명인이 태어날 것을 두려워하여 그곳에 태실을 정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따라서 태실의 일정범위는 금혈지라 하여 다른 평민이나 양반이라 해도 묘를 쓰지 못하도록 조치되었다. 만약 이 태실을 훼손하거나 알정 범위에 침범하면 그 벌을 받거나 역적으로 몰려 심한 곤경을 당해야 했다.

그 대표적인 태실이 서산의 명종 태실과 충주의 경종 태실 등이다. 경상북도 성주군(星州郡) 월항면(月恒面) 인촌리(仁村里)에 있는 서진산(棲鎭山)은 태실이 가장 많은 곳이며, 조선왕실 13위의 태실이 있어 태봉(胎封)이라고 부른다.

순조대왕의 태봉 석조물이 보이면 주의를 기울여 둘러본다. 좌선으로 2개의 지각이 확실하게 갈라져 있고 우선으로는 뒤쪽으로 하나의 지각이 갈라져 있다. 그리고 앞쪽으로는 약하게 나온 지각이 있는둥 마는둥 나와 버티고 있고 전순으로 자란 용맥이 앞으로 뻗어나간다.

4개의 지각이 있고 돌출되어 하늘을 찌르고 있으며 혈심이 꽃이 핀 형상이니 혈이 분명하고 그 혈상은 전형적인 돌혈이라. 더구나 입수처에는 부드러운 돌이 자태를 뽐내어 그 혈상이 지닌 힘을 보여준다. 혈상 주위로는 각가지 형상을 지닌 산들이 읍조리듯 조안을 형성하여 멀거나 가깝게 수그리고 양 옆으로 내당수가 혈 앞에서 합쳐져 그 끝이 무성한 숲 속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산허리에서는 물소리가 들리나 혈심에서는 들리지 않으니 천상 타고만 명혈이다. 용이 승천하듯 굽이치며 올랐고 갈기처럼 바위가 보인다. 이는 전형적인 비룡상천의 모습이 아닌가? 비룡상천은 돌혈이며 산 정상에 혈심이 있어 더 이상 높아지지 않고 하늘을 바라보는 상이다. 따라서 비룡형과는 다르다 할 것이다.

더듬어 보면 이곳은 조선시대 제23대 순조 임금의 태실(胎室)이 있는 곳이다. 이 태실은 정조 11년(1887)에 만들어진 것이며, 그때 이 산봉우리를 태봉산(胎鋒山), 일명 태봉(胎鋒)이라고 이름하였고, 보은현을 보은군으로 승격시켰다 한다.

태실비는 순조 13년에 세워진 것인데, 비교적 완전하게 보전되어 있다. 비석 받침인 거북모양의 귀부에 세운 비석에는 "주상전하태실(主上殿下胎室)"이라고 음각 되어 있다. 태항아리는 1927년 일제가 창경궁으로 옮겨가고 현재는 비와 석조물만 남아 있다.

너무나 아름다운 산에 아름다운 명당이 아니던가?
여담이지만 산을 내려올 때는 길을 따라 내려왔다. 막상 내려와 내를 건너며 살펴보니 태실을 오르는 길은 세심정에서 약 100여미터를 올라 문장대와 비로봉으로 갈라지는 길에 다다르기 10미터 전에 물을 건너 바위틈을 살피면 찾을 수 있다.

안종선교수 블로그 http://blog.naver.com/sungbosung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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