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은 삼국시대 이전부터 여태까지 관동지방의 정치와 경제적 중심지를 자임해 온 도시다. 그뿐만 아니라 잘 원형이 보존된 전통문화와 역사유적이 어느 고도 못지않게 풍부하다. 이렇듯 강릉이 전통도시로서의 면모를 오래도록 유지해온 데에는 임진왜란 등의 전화(戰禍)를 별로 입지 않았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오늘날도 강릉 사람들은 제 고장이 오랫동안 큰 전란에 휩쓸리지 않은 것이 대관령 국사서낭신, 즉 범일국사의 가호(加護) 때문이라 믿는다. 전설에 따르면, 임진왜란 당시 왜군들이 강릉으로 진격해오자 범일국사가 대관령 숲의 나무들을 모두 군사로 둔갑시켜 강릉을 지켜냈다고 한다. 이런 전설만으로도 범일국사에 대한 강릉 사람들의 믿음이 얼마나 도타운지를 쉽게 가늠할 수가 있다.

지금도 강릉 사람들은 해마다 단오절(음력 5월5일, 올해는 6월4일)이면 국사서낭신을 비롯한 여러 신께 풍년과 안녕을 기원하는 단오제를 성대하게 연다. 전국 최대, 최고(最古) 규모의 단오절 행사인 강릉 단오제(중요무형문화재 제13호)는 사실 4월9일부터 시작된다.

이 날 강릉 시내의 칠사당에서 단오제에 올릴 신주(神酒)를 빚기 때문이다. 4월 보름날에는 대관령의 국사서낭당에서 큰 제사를 올린 뒤 신목(神木)을 앞세우고 강릉시 홍제동의 국사서낭당으로 내려간다. 내외지간인 국사서낭신과 국사여서낭신을 한 자리에 모시기 위해서다. 본격적인 단오제는 단옷날 이틀 전인 5월3일의 영신제를 시작으로 막이 오른다.

밤에 열리는 이 행사에는 단오등(端午燈)을 앞세운 행렬이 시내 곳곳을 누비고, 오색찬란한 불꽃들이 어둑한 밤하늘을 화사한 꽃밭으로 수놓는다.

또한 단오제 내내 남대천의 고수부지에 들어서는 단오장은 밤낮 없이 축제 열기를 고조시키며 수많은 구경꾼들의 발길을 끌어당긴다.

강릉 단오제의 꽃은 단오굿이다. 강릉 지역의 내로라하는 무격(巫覡)들이 펼치는 이 단오굿은 동해안의 전통적인 별신굿과 흡사하다. 하지만 굿판의 규모와 무격들의 예술적 기량만큼은 전국에서도 으뜸으로 친다. 단오굿은 5월4일부터 7일까지 나흘 간 계속되는데, 매일 아침마다 조전제(朝奠祭)를 시작으로 해거름 녘까지 계속 이어진다.

그리고 마지막 날 밤에는 제의에 쓰였던 것을 모두 불태우고 국사서낭신을 배웅하는 송신제가 올려진다. 이 강릉 단오제는 중요무형문화제13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관령 성황사와 산신각에 오르기 위해서는 과거 영동고속도로였던 길을 이용해야 한다. 새로이 열린 고속도로를 따라가면 성황사와는 멀어진다. 이제 구도로가 된 옛 고속도로는 이제 와서 관광지로서 인기가 높은데 사실 과거의 영화로웠던 일부가 퇴색된 면도 없지 않다.
대관령 옛길로 간다.

대관령 정상에 다다르면 텅 빈 휴게소가 나타난다. 옛날의 고속도로에 서 있던 휴게소이다. 비록 차들이 많지 않으나 관광철에는 적지 않은 차들이 서 있는 곳이다. 입구에는 흰색의 거대한 풍력 발전기가 눈을 잡아 한참동안 바라보게 한다. 그러나 가을의 대관령은 쓸쓸하다. 이곳이 그토록 번성했던 곳 이었던가 하는 마음이 들어 의아스럽기만 한데, 이곳에서 방향을 잡는다.

옛 휴게소에서 바라보면 길 건너 작은 주유소가 있다. 물론 이 주유소도 장사를 하지 않는다. 옛 휴게소에서는 오버브릿지로 건너간다. 이 다리를 건너면 정면으로 작은 길이 보이는데 대관령양떼목장이라는 표지가 있다. 대관령 양떼목장과 반대편으로 갈라져 들어가는 작은 시멘트 포장이 된 길이 나온다.

이 시멘트 길을 따라 정상 쪽으로 난 샛길을 타고 올라간다. 가을에는 산불을 조심해야 하기 때문에 지키는 사람도 있다. 이곳이 대관령 기상대인데 이 입구를 지나 계속해 시멘트 길이 깔려있다. 이 길을 따라 올라가면 오른쪽으로 선자령이다. 직진하면 국사성황당이 나온다. 선자령에 오르면 대관령의 정취를 느낄 수 있으나 가을에는 산불에 대한 염려로 올라가지 않는 것이 좋다.

선자령으로 올라가지 않고 직진하여 올라가면 곧 우묵한 곳이 나온다. 마치 바가지 모양으로 생긴 작은 분지인데 전형적으로 교쇄가 이루어진 아늑한 곳이다. 이곳에 전통모양을 딴 집이 3채 있는데 1채는 대관령 성황사이고 다른 하나는 산신각이다.

그리고 작은 절이 하나 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바라보면 중앙에 있는 건물이 대관령 성황사이고 우측이 산신각이다. 이곳에는 그밖에 현대식 건물 2채가 있는데 하루도 빠지지 않고 굿을 하기에 이용되는 집인 모양이다.

먼저 성황사를 살핀다. 강릉단오제가 열릴 때마다 성황신을 모시고 내려가는 곳이다. 여기에 김유신 장군과 더불어 신라승려 범일(梵日·810∼889) 국사가 산신으로 자리 잡고 있다.
대관령 정상에서 북쪽으로 약 1㎞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강릉 단오제(端午祭)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매년 음력 4월 15일에 민정관이 이곳에 와서 제향을 올리는 곳이다. 대관령(大關嶺) 국사서낭당(國師城隍堂), 산신당(山神堂)의 여러 신(神)은 영동지방(嶺東地方)의 가뭄, 홍수, 폭풍, 질병, 풍작, 풍어 등을 보살펴 주는 영험한 신으로 믿어오고 있다.

대관령 국사서낭은 이곳 출신의 승려인 범일국사(梵日國師)로 전해지고 있으며, 집의 구조는 목조기와집으로 맞배집이다. 벽면에 서낭신상(城隍身像)이 채색화로 그려져 있다. 범일국사의 전설과 같은 신화는 이곳 서낭신의 가치를 드높이고 있다.

옛날 학산에 과년한 처녀가 살고 있었는데 하루는 마을 앞 우물, 석천에 물을 길러 갔다가 표주박에 햇빛이 유난히도 밝게 비치는지라 처녀는 아무 생각도 없이 물을 마셨다. 그런 연후 갈수록 몸이 달라지더니 14삭만에 아이를 낳았다. 처녀가 아이를 낳았다는 수치심에 그녀는 아이를 포대기에 싸 마을 뒤 학바위에 갖다 버렸다.

그런 후 사흘이 지나자 걱정이 된 그녀는 그 곳에 가보니 죽었을 줄만 알았던 아이가 살아있지 않은가. 이상하여 숨어서 지켜보니 잠시 후 학 한 마리가 날아와 품어주고 신기한 붉은 열매 세 개를 아이에게 먹여 주며보살피고 있었다. 이에 다시 데려다 키웠는데, 그가 훗날 구산선문(九山禪門)중 하나인 굴산사를 창건한 범일국사이다.

강릉시 학산에는 굴산사의 흔적인 당간지주와 부도탑이 남아있다. 또한 현재도 전설의 장소인 석천우물과 학바위가 남아있어 신성성을 유지하고 있다. 범일(梵日)이란 이름은 해가 떠있는 바가지에 물을 마신데 연유한 이름이다. 입적 한 후 강릉과 영동지역을 수호하는 대관령국사서낭신이 되었다고 한다. 그 후 강릉지역에 왜군이 쳐들어왔는데 그때 대관령국사서낭님이 나무를 군사로 변하게 하여 왜군을 물리쳤다는 전설도 전하고 있다.

성황사는 마지막 맥 아래에 자리하고 있다. 성황사 뒤로 바라보면 부드러운 곡선을 지닌 산기슭이 보이는데 올라가 살펴보면 혈판이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혈판은 유혈의 변형인 잉혈인데 즉 성황사는 잉혈의 측면 앞쪽에 자리하고 있는 셈이다.

성황사 우측 작은 골 옆으로 한 칸 짜리 산신각이 자리하고 있다. 산식각은 서낭당에서 약 50m 지점 동북쪽에 있는 목조기와집으로 맞배집이며, 이곳에 모신 산신은 김유신장군이라고 전한다. 당내에는 ‘대관령산신지위’(大關嶺山神之位)라는 위패가 있고, 전면 두 기둥에는 주련(柱聯)이 있고 좌우에 각각 ‘강인간지오복’(降人間地五福)과 ‘응천상지삼광’(應天上地三光)이라 쓰여 있다.

주위를 둘러보면 주룡에서 맥이 내려와 작은 당판을 형성하고 있다. 좌우측의 계곡과 그다지 차이가 나지 않아 자세히 보이지 않으나 전순이 확연할 뿐 아니라 축대가 쌓여져 있기는 하지만 전형적인 유혈의 혈상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강원도 기념물 제 54호인 대관령 성황사 및 산신각(大關嶺 城隍祠 및 山神閣)이 자리한 곳은 강릉이 아니라 평창군 도암면 횡계리에 속한다.

그러나 관리는 강릉시에서 하고 있으며 강릉에서 더욱 찾아가기 수월하다. 애초에 대관령 성황사 및 산신각은 현재의 위치에 자리하고 있지 않았으며 방향도 달랐다. 애초에는 새로 난 영동고속도로 7호터널 부근의 반정이라는 곳에 자리하고 있었으며 방향도 동해를 바라보고 있었다고 한다.

안종선교수 블로그 http://blog.naver.com/sungbosung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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