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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보의 풍수여행-23 '신미양요의 아픔이 스며있는 광성보'
2014년 02월 17일 (월) 10:16:02 안종선(교수) sungbosungbo@naver.com

   
▲ 안종선(교수)

사적 227호로 지정된 광성보는 덕진진과 강화대교 사이에 있다. 다시 생각하면 덕진진에서 해안도로를 따라 불과 5분 정도 달려가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특히 건너편은 김포시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역시 역사적인 사적지 덕포진으로 덕포진에 자리한 손돌의 묘에서 정면이다.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833번지에 자리한 광성보는 조선 효종 9년(1658)에 설치되었으며, 숙종 5년(1679)에 용두돈대, 오두돈대, 화도돈대, 광성돈대 등 소속돈대가 모두 축조되었다. 영조 21년(1745)성을 개축하면서 성문을 건립하고 안해루(按海樓)란 현판을 달았다.

고종 3년(1866) 프랑스의 극동함대와 치열한 격전(병인양요)을 치루었으며, 고종 8년(1871) 미국의 아세아함대(신미양요)가 이 성을 유린하여 우리 수비군은 탄환 및 화살이 떨어지자 어재연장군 이하 전 장병이 백병전으로 맞서 용감히 싸우다 전원이 장렬히 순국한 역사적인 곳이다.

광성보 내에는 신미양요시 순국한 순무천총 어재연, 동생 어재순의 쌍충비와 무명용사들의 합장묘인 신미순의총 그리고 1977년 전적지를 보수하고 세운 강화 전적지 보수 정화비 등이 있다.

강화도를 관산하다 보면 어디부터 가야하는가 하는 갈등이 생기기도 한다. 강화도는 그다지 넓지 않다고도 할 수 있으나 한국에서 큰 섬으로 손을 꼽을 수 있는 곳이고 유적지가 매우 많다. 갈등이 생기는 곳은 갈 곳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해안순환도로를 따라 이리저리 돌다보면 병인양요, 신미양요, 운양호사건의 격전지를 만날 수 있다.

광성보는 신미양요 때의 격전지이다. 광성보 내에는 안해루와 광성돈대, 손돌목돈대, 용두돈대가 있으며 산책로가 잘되어 있어 많은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곳이기도 하다. 매년 음력 4월 24일에는 신미양요 순국선열들을 위한 광성제가 열린다. 광성보 내에는 산책로가 잘 정비되어 있어 가족이나 연인과 함께 걷기가 참 좋다.

광성보는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해안에 소재하고 있으며 강화해협과 김포와 마주보고 있다. 고려시대의 성을 1618년(조선 광해군 10년)에 외성을 보수하고 1656년 광성보를 설치했다. 이 보의 돈대는 1679년에 축조된 것이며 오두 화도 광성돈대와 오두정 포대가 이보에 소속되었다. 그러나 완전한 석성으로 개축된 것은 1745년으로 이때 안해루란 성문을 세웠다.

이곳은 신미양요의 가장 격렬했던 격전지로서 1871년 4월 미국의 로저스가 통상을 표방하면서 아세아 함대를 이끌고 1230명의 병력으로 침략하였을 때, 미국의 상륙부대가 초지진 덕진진을 점령한 후 광성보에 이르자 조선의 군병들은 이들을 맞아 백병전을 전개하였다. 조선군 지위관인 어재연 장군 이하 전용사가 용감하게 싸웠는데 포탄이 떨어지면 칼과 창으로 싸우고 칼과 창이 부러지면 맨주먹으로 싸워 한사람도 물러서거나 포로가 되지 않고 모두 장렬히 순국하였다.

당시 미국의 병기는 조선이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9인치 포와 8인치 포 등 85문의 대포와 최신무기로 남북전쟁과 스페인 전쟁을 겪은 백전노장인 1230명의 정예군인데 비해서 우리 조선군은 심지에 불을 붙이는 화승포 3문과 구식장총 몇 정과 화약 4000근 군량미 100석에다 300명 미만의 전투 경험이 적은 미약한 병력이었다. 이들이 목숨을 걸고 싸운 것이다. 미국은 조선군의 충성심과 용맹스런 군인정신에 놀라 4월 25일 퇴각하고 역사상 처음이었던 한미전은 48시간 만에 끝이 났다.

   
이후 미군들은 물리적인 전투에는 이겼으나 정신적인 전투에는 졌다라고 술회하고 있다. 미국 전사의 기록에서 퇴각은 이 신미양요가 처음이었다고 한다. 여기서 필사항전의 군인정신과 호국정신을 길이 본받아야 할 것이다. 신미양요 때 성책과 문루가 파괴된 후 폐허가 되어 있는 것을 1977년 광성돈, 안해루, 용두돈과 59명의 무명용사의 신미순의총 어재연장군 형제의 쌍충비각들이 보수 정화되었다.

강화도에는 원래 5개의 진과 7개의 보, 53개의 돈, 8곳의 포대, 8곳의 봉수, 4곳의 요망대등이 있었으며 현재는 그중 일부만 복원이 되어있다. 강화도 해안을 따라 이리저리 돌다 보면 곳곳에 이러한 호국의 시설들이 있다.

광성보에도 돈대가 설치되어 있는데 다리미 같은 모양의 돈대 안에는 당시 사용하던 대포가 복원되어있다. 용두돈대는 좁은 강화해협에 용머리처럼 쑥 내밀고 있는 암반을 이용해 쌓은 돈대이고 손돌목 돈대는 광성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는 돈대로 둥그렇게 쌓아 올렸다.

광성보의 입구는 안해루(按海樓)이다. 안해루는 성문 모양을 지니고 있다. 바다를 위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바다를 누른다는 의미의 이 누각은 우리 조상의 의기를 보여주는 듯하다. 안해루는 광성보의 입구로 이 문을 나서면 해안이 나온다. 신미양요 때 불타 없어진 것을 광성돈과 함께 1977년에 복원한 것이다. 안해루를 지나 비스듬한 산길을 오른다. 그다지 힘들지는 않다.

산허리를 따라 오르면 쌍충비각이 나온다. 광성보 안에 세워진 이 쌍충비각을 순무중군인 어재연 장군이「우리는 이제 피할 곳도 없다. 적병은 이 포대를 좁혀오니 죽기로써 싸워라」고 독전하여 앞장서서 싸웠다.

이때에 군인도 아닌 동생 어재순이 달려와 합세하려 하므로 형 어재연 장군이 말하기를 「군인은 군인의 갈길이 따로 있으니 너는 어서 네 갈 길로 가거라」하고 말하니까「나라가 위급한 이때에 어디를 갑니까?」하고 합세하여 전군을 지휘하며 분전하다가 두형제가 함께 순국하였다. 이두 형제의 높은 뜻을 기리기 위하여 쌍충비각을 세우게 된 것이다.

쌍충비각 앞에서 간단한 묵념을 하고 내려와 길을 걷기 시작하면 신미순의총이 나온다. 무명용사의 무덤인 신미순의총은 광성보 안에 있는 쌍충비각에서 좀 떨어진 아래 등성이에 있다. 1871년 신미양요때 용감하게 적과 싸우다 순국한 59인의 이름 없는 무명용사들을 7개의 분묘에 합장한 것이다.

1976년 박정희 대통령께서 국군묘지에 모시는 것처럼 잘 모시라」는 분부로 묘역에 담을 두르고 정성들여 정화하였다. 대통령께서는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고개 숙여 경건히 참배하도록 하라」고도 말씀 하셨다.

풍수적으로 보면 나름의 의미가 있다. 언뜻 보아서는 마치 골짜기 쪽으로 묘를 쓴 것 같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양 옆으로 두개의 지각이 환포하고 있으며 등 뒤로 귀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귀성도 양 옆으로 두개의 지각으로 환포하듯 보이는데 약해 보이기는 해도 후탱귀(後撑鬼)가 정확하다.

이처럼 두개의 지각이 환포하고 후탱귀가 있다면 전형적인 와혈이다. 나라를 위해 순국하신 열사들의 무덤이 명당이라고 부르는 위치에 자리하고 있음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안타까운 것은 이 묘역이 와혈 임에도 정확하게 제자리를 쓰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여러분의 묘역을 조성해야 했으므로 모두 혈처에 들기에는 부족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묘역을 올려 써서 지금의 도로에 모셨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한참 걸어가면 광성돈대가 나온다. 광성돈대는 광성보에 소속된 돈대중의 하나이다. 광성돈대에는 옛날 우리의 조상들이 사용하던 화포들이 전시되어 있다.

대포들 중 가장 큰 것은 홍이포라고 한다. 홍이포는 포구에서 화약과 포탄을 장전한 다음 포 뒤쪽 구멍에 점화하여 사격하는 포구장전식화포로 사정거리는 700m이며 조선 영조 때부터 주조하여 사용했다. 화약의 폭발하는 힘으로 포탄은 날아가지만 포탄 자체는 폭발하지 않아 위력은 약하다. 지금의 포와는 그 형상이나 위력이 너무도 다르다.

홍이포는 흔히 블랑기라고 하는 화포의 일종으로 본다. 중간 크기의 포는 소포라고 불리는 것으로 포구에서 화약과 포탄을 장전한 다음 포 뒤쪽 구멍에 점화하여 사격하는 포구장전식화포로 사정거리는 300m이며 당시 우리나라 재래식 화포 중 가장 발달된 형태를 갖추고 있다.

가장 작은 불랑기는 임진왜란을 계기로 널리 사용된 화승포로 포 1문에 다섯 개에서 아홉 개의 자포를 결합하여 역속 사격할 수 있는 발달된 화기였다.

광성돈대를 지나면 오른쪽으로 불쑥 솟아오른 돈대가 보인다. 손돌목 돈대이다. 손돌목 돈대는 조선 숙종 때 축조된 돈대이다. 원래 돈대 중앙에 3칸의 무기고가 있었고, 포좌가 3개처가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화포를 볼 수 없다. 광성보에서 가장 고지대에 위치해 있어 강화 일대를 훤히 내려다 볼 수 있다.

손돌목 돈대에는 전설이 있다. 고려 고종이 몽고의 침입을 피해 강화로 피신하던 중 광성보를 지나자 갑자기 뱃길이 막혔다. 피난길에 있던 왕은 뱃사공인 손돌의 계략이라 여겨 그를 죽이라 명령했다.

   
손돌은 이곳의 지형으로 인한 것이라 말했지만 왕은 손돌의 말을 믿지 않았다. 손돌은 뱃길 앞에 바가지를 띄우고는 그 바가지가 떠가는 대로만 가면 뱃길이 트일 것이라 일러주고는 처형을 당했다. 결국 왕은 손돌이 가르쳐준 대로 바가지를 띄워 무사히 강화에 도착했는데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불어왔다.

왕은 비로소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크게 뉘우쳐 말머리를 베어 손돌의 넋을 제사 지내니 그제야 풍랑이 그쳤다고 한다. 그나마 오랜 세월동안 손돌의 묘도 유실되었으나 김포 역사연구가들의 노력으로 손돌의 무덤을 최근 다시 찾을 수 있었다. 그 후로 사람들은 덕진진 앞 좁은 둑길을 손돌목이라 불렀다. 그 앞산, 김포에 해당하는 해변에는 손돌의 무덤이 있고, 해마다 손돌이 죽은 10월20일경에는 큰바람이 불어 손돌의 넋이 아직도 그곳에 있음을 암시한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 바람을 손돌바람이라고 부른다.

이 손돌목 돈대는 풍수적으로 돌혈에 해당한다. 사유에 지각이 뻗어 있고 오똑한 모양, 마치 공이 허공에 뜬 모양이 전형적인 돌혈이다. 돈대 안으로 들어가 이리저리 돌면서 살펴보면 살펴볼수록 이 돈대의 위용과 아름다움, 그리고 풍수를 배우는 사람으로서는 이 돈대의 왕성한 지기에 감탄을 금할 수 없다.

용두돈을 보면 감탄을 금할 수 없다. 광성보 성문에서 고개를 넘어 5분쯤 가면 바다로 용의 머리처럼 쑥 들어낸 돌출부의 암반위에 세워진 절묘한 돈대로 언덕에서 내려다보면 한폭의 그림같이 아름답다. 오늘날과 같이 발달된 무기로 무장하였다면 작은 보트하나 그냥 통과 할 수 없는 곳이다. 이 돈대는 용의 머리처럼 생긴 묘한 지형을 이루고 있다. 병인 신미양요 때 치열한 포격전이 벌어져 성곽이 파괴되었던 것을 1977년 복원하였다.

돈대 앞은 여울진 목으로서 수면에 돌이 많은 것이 특징으로 배가 들어오기엔 곤란한 지점이다. 일명 사두돈(蛇豆墩)이라고 하며 신미양요 때 격전지로 알려져 있다. 또 병인양요에는 불란서 함대에서 불질을 당한 곳이기도 하며, 경내에는 강화전적지 정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용두돈대는 광성보에 소손된 돈대 중 가장 아름다운 돈대이다. 해협을 따라 용머리처럼 쑥 내민 암반을 이용해 축조되었다. 이 돈대에 이르는 길에 과거의 사진이 계시되어 있는데 보면 볼수록 신기하고 아름답기도 하고 흑백의 사진으로 보면 과거의 모습을 유추할 수 있다. 그러나 사진과 지금의 모습은 약간 변한 듯한데 애초에 이런 모습이었는지 혹은 정화사업에서 변화되었는지 알 수 없다.

이 용두돈은 풍수적으로 많은 배움을 준다. 전형적인 사두혈(蛇豆穴) 모양인데 길게 뻗어나간 기맥 끝단에 자리한 이 돈대의 모양은 사두형이지만 잠두혈이라는 이름이 어울릴 것이다. 들어가는 방향에서 왼쪽에 바위로 이루어진 지맥이 바다를 향해 뻗어나간 모습이 보이는데 이는 전형적인 바닷가 혈처의 보룡(保龍)이다.

혹자는 이 용두돈대의 모양이 사두형인 것은 맞지만 막상 혈판의 모양이 갖추어지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고 기맥을 느낄 수 있는 단학 수련자들이라면 용두돈대의 혈심이 기념비 부근에 있음을 느낄 것이다.

특히 바위로 이루어져 있어 잘 살피기 어렵지만 사유에 지각이 뻗어 있고 그 너머로 바다가 넘실거림을 알 수 있다. 단지 들어가는 입구에서 보면 우측에 뒤쪽으로 나와 있어야 하는 지각이 잘 보이지 않아 지각이 3개뿐이다 하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기맥을 측정해 보면 우측 바위 쪽으로 기맥이 뻗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흔히 바다가 아니라도 지각 대신 바위가 있으면 지각으로 인정해주는 것이 바로 그 한 가지 방법이다. 따라서 용두돈대는 정상부가 정리되고 조근 깎였지만 전형적인 돌혈(突穴)이다.

이와 같은 모양은 전형적인 곶(串)의 형상이다. 곶은 바다에 돌출한 육지의 선단부(先端部)를 지칭하는 말로 갑(岬), 또는 단(端)이라고도 한다. 흔히 관(串)자를 빌려 ‘관’ 또는 ‘곶’으로 부르기도 한다. 한문 글자가 말해주듯 산의 끝이어야 하고 단애가 이루어진 곳이 많다. 즉 산이 길게 기맥을 끌고 내려와 바다를 만나 단애를 이룬 곳이라면 곶의 요건을 충족한다. 곶보다 규모가 큰 것을 반도라고 하는데, 반도의 말단부를 곶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우리말에서는 ‘꼬치’처럼 바다 쪽으로 길게 내민 육지를 ‘곶’이라고 하는데, 이 ‘곶’을 한자의 관(串)으로 표기했다. 이는 글자의 형상을 따른 것이다. 즉, 일정한 물체나 산을 뚫고 뻗어 나온 모양이다.

串은 갑골문에서 끈이나 꼬챙이로 어떤 물건을 꿰어 놓은 모습을 그렸다. 串은 어떤 네모꼴의 물건들을 세로로 꿰어 놓은 모습의 형상이다. 串은 형상성을 더욱 강화하기위해 l (꼬챙이 찬)을 만들기도 했는데 串에다 세로 꼬챙이(곤)가 하나 더해진 모습이다. 글자를 형상으로 따져 산의 중심을 통과하여 길게 내려온 모양을 의미하는 글자로 한자 발음이 없기 때문에 형상을 취했다. 따라서 串을 ‘곶’으로 읽는 것은 우리말에서만 존재하는 특수 용법이다.

곶이 이루어지는 원인은 산등성이가 침수된 경우나 굳은 암석으로 형성되기 때문에 물결 침식(浸蝕)에 저항해서 생기는 경우가 많다. 이와 같은 결과에 따라 해변의 바위로 돌출된 곳이 많다. 또한 모래의 퇴적(堆積)으로 생기는 사취(砂嘴)가 바다에 돌출해서 형성되는 경우도 있다.

곶은 등대 또는 무선전신국(無線電信局) 등의 소재지로 이용되는 경우가 많다. 아프리카 최남단 희망봉(喜望峰)이나 한국의 장산곶(長山串) 등은 좋은 예이다.

우리나라에도 곳으로 불리는 곳은 아주 많다. 물론 곶이라는 이름이 없어도 해변에 다가가 보면 곶의 형상은 아주 많다. 장연(長淵)반도 말단부를 장산곶(長山串), 장기반도 말단부를 장기곶, 또는 장기갑이라고 하는 따위이다. 

   

지도에서 찾아보아도 갑과 곶이 번갈아 쓰임을 알 수 있다. 단(端)자가 붙은 곶이름은 동해안의 곶에 많이 쓰여지는데, 칠보산지루(七寶山地壘) 북쪽의 어랑단(漁郞端), 미사일 발사로 유명해진 함경도 무수단(舞水端), 강원 통천군 북부의 수원단(水源端) 등이다. 육지가 침강하면 골짜기는 물이 차서 만(灣)이 되고, 산줄기는 물 위에 남아 반도나 곶이 된다.

아주 큰 것은 반도라고 부른다. 반도의 끝이나 튀어나온 부분은 곶이다. 그러나 바다를 향해 튀어나온 곳이라 해도 곶이라고 불리지 않는 곳이 있다. 아주 작은 돌출부는 반도나 곶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지 않는다. 따라서 곶은 일정한 크기를 지녀야 한다. 다른 형상적 특징으로는 반도는 길게 튀어나온 형상이고 곶은 두루뭉술하거나 지나치게 길게 튀어나오지 않은 돌출부를 이야기 하기도 한다.

곶은 대형일 경우도 있지만 작은 형상을 지닌 경우도 적지 않다. 곶의 특징은 튀어나왔다는 것이다. 바다를 향해 돌출의 형상은 전형적인 풍수의 돌출에 해당한다. 돌출은 풍수에서 혈이나 명당의 조건을 충족시키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바닷가에 돌출된 곶의 형상은 음택지의 명당에 해당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강화도의 용두돈과 같은 경우가 이에 해당하며 이 경우 바다는 부(富)를 의미하는 일반 적인 사격으로 해석하지 않으나 파도소리는 소란스러움, 혹은 구설수로 해석한다.

마지막으로 이 용두돈대에는 정화기념비 비문이 있다.

<정화기념비 비문 >
강화는 한강 어귀에 있어 사면에 물이 둘리고 섬 안에는 중첨하여 천연적인 요새지라, 역대를 통하여 전란이 있을 때에는 피난처가 되었지만 다른 한편 병화를 입어 편안한 날이 없었기에 이 언덕 저 갯가 풀 한포기 돌 한덩이에 역사의 사연이 서리고 미치지 않은 것이 없다. 고조선 이래로 조상들의 한 많은 유적 중에서도 굳이 민족의 피가 어린 전적지를 헤아려 보면 칠백년 풍우가 스쳐간 고려때 궁궐 옛터 고종 19년 서기 1232년 몽고의 침략으로 수도를 송도로부터 강화로 옮겨 강도라 일컫고 원종 11년 서기 1270년 환도해 가기까지 무릇 39년동안 항몽의 근거지가 되었었고, 문화의 샘터였기에 우리는 여기를 잊지 못한다. 강화성은 이곳에 천도했던 고려의 도성이었고 중성을 쌓은 뒤 해안선을 따라 외성을 쌓았으나 인조 14년 서기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이 성을 지키지 못해 온갖 치욕을 맛보았었고 다시 그 뒤 고종3년 병인 서기 1866년 프랑스의 극동 함대가 갑곶진에 상륙을 개시하고 강화성과 문수산성을 점령하여 약탈을 자행하다. 양헌수 장군이 지휘하는 정족산성의 전투에서 산포군의 맹렬한 공격을 받고 퇴각 했던 것이다. 5년이 지나 고종 8년 신미 서기 1871년 미국의 아세아 함대가 통상을 표방하고 침입하여 초지진 덕진진 광성보 등을 차례로 공격해 오자 우리는 최후까지 응전 했으나 무력불급으로 어재연 장군등 수백명 용사들이 순국 했었다. 4년 지나 고종 12년 을해 거기 1875년 일본 군함 운양호가 초지진 포대를 공격한 뒤 이듬해 병자년에 이른 바 강화도 조약을 맺었으며 그로 인하여 일본의 침략이 시작되었던 것이니 강화도야 말로 민족시련의 현장이 아닐 수 없다. 이같 유서깊은 역사적 옛터에 세월이 흘러 성곽은 헐어지고 집터에는 잡초만이 우거졌더니 박정희 대통령이 강화의 전적지를 돌아보시고 여기는 우리 민족의 자주정신과 호국의 기상을 어어받는 국민교육의 정신적 도장이 될 곳이라 정성들여 복원정화 하라는 분부를 내리시므로 그 뜻을 받들어 문화공보부가 이 일을 마치니 이곳을 찾는 이들은 누구나 발길을 멈추고서 가슴에 국난극복의 결의를 다짐하게 될 것이다

안종선교수 블로그 http://blog.naver.com/sungbosung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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