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종선(교수)
용두대를 찾고 나서 죽성리 해안으로 달렸다. 죽성리 해안에 황학대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죽성리는 크게 두개의 공간으로 나누어져 있는 것 같다. 한 곳은 창두끝 방향이고 한 곳은 죽성초등학교 안쪽의 마을이다.

보통 해동용궁사 방향이나 기장읍 방향에서 접근하면 창두끝 마을에 도달하게 되는데 이곳은 해변에 온통 횟집 투성이다. 이 마을에서 죽성초등학교 방향을 찾아가는데 지도에는 크게 나타나지만 막상 찾아가려면 쉽지 않아 창두끝 마을에서 샛길로 빠져 나가야 한다.

따라서 우선 죽성리를 찾아간 다음 죽성초등학교가 있는 해변 마을을 찾아가야 할 것이다.

죽성초등학교 앞에서 바다가 있는 방향으로 좌회전하면 바다가 곧 나타나는데 몇 개의 횟 집이 있다.

이 횟집을 지나면 유난히 바다로 툭 튀어나온 곳이 있다. 마을 노인정과 이어지는 기맥위에 놓여진 이 황학대는 길로 인해 기맥이 끊어진 듯 보이고 바위가 드러나 있으나 찾아가보면 기맥이 느껴지는 곳이다.

황학대(黃鶴臺)는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죽성리 두호마을에 있는 황색바위가 길게 바다에 돌출 된 곳을 말한다. 남쪽 암벽에는 기장출신 진사 방치주(方致周)의 친필인 ‘황학대’라는 세 글자가 새겨져 있다.

황학대의 이름 유래는 이곳 지형이 꼭 황학이 나래를 펼치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한데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이곳에는 수년 전까지만 해도 백사장과 해송림이 펼쳐 있었으며, 뒤쪽으로 죽성리 왜성(부산광역시 기념물 제48호)이, 북쪽에는 용두대가 이어진 해안의 절경지이다.

황학대는 고산 윤선도가 기장에서 7년 간의 긴 유배생활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곳에서 ‘견회요와 우휴요’ 등 주옥같은 시 여섯 수를 남긴 것 역시 아는 사람이 극히 드물다.

윤선도는 정철·박인로와 함께 조선시대 가사문학(歌辭文學)의 최고봉을 이룬다. 윤선도는 1616년(광해군 8) 전횡을 일삼던 영의정 등을 탄핵하는 상소문을 올린 것이 화가 되어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되었다가, 1618년 기장으로 이배(移配) 되었다. 유배생활 중 백사장 건너 수십 그루의 노송이 있는 송도를 ‘황학대’라 이름짓고 매일 찾았다 한다.


황학대는 중국의 유명한 이태백·도연명 등 많은 시객(詩客)들이 찾아 놀던 양자강 하류에 있는 황학루(黃鶴樓)의 경치에 비교하기도 한다. 고산은 신선이 황학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이곳에서 갈매기와 파도소리를 벗삼아 한 많은 시름을 달래곤 했다.

이곳에 유배 중 많은 서적들을 어렵게 구해 탐독했으며, 마을 뒷산에 올라 약초를 캐어 병마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보살피곤 했는데, 이곳 사람들은 고산을 한양에서 온 의원님이라 불렀다고 전한다.

당시 이곳에는 초가 몇 채가 있었고, 죽성천의 맑은 강물이 바다와 만나는 곳에 아름다운 백사장이 있었다. 인근 부엉산에서 들려오는 부엉이 울음소리는 낯선 땅에 유배된 고산의 마음을 더욱 안타깝게 했으리라.

『차성가(車城歌, 1860)』에는 “두호에 닻을 놓고 왜선창에 줄을 맨다. 황학대 어디메뇨 백운이 우유하다”라고 하여 이곳이 경승지임을 알리고 있다. 이곳은 신라시대 토성(土城)이 강어귀를 따라 비탈진 곳에 축성되어 있었다.

조선시대 이곳에 두모포진(수군진영)이 있었으나, 임진왜란 후에 지금의 동구 수정동 부근으로 옮겼다. 마을 뒷산에는 봉수대가 있었다.

황학대는 전형적인 혈판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지금의 모습은 과거와 많이 변했을 것이다. 가장 큰 변화는 입수 방향을 자르고 지나간 길이 그것일 것이다. 그러나 다행스러운 것은 완벽하게 기맥이 절단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사유에 4개의 지각이 뻗어 나온 모습은 돌혈의 혈상을 보여주고 있다.

높이라고 해 보아야 겨우 10여미터에 불고한 작은 산이다. 여름이면 황학대의 정상에 올라 사랑을 이야기하고 야경을 바라보며 바람을 즐기는 것도 좋은 피서가 될 듯하다.

안종선교수 블로그 http://blog.naver.com/sungbosung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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