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종선(교수)
진천 농다리로 알려진 진천농교는 충북 진천군 문백면 구곡리의 굴티마을 앞을 흐르는 세금천에 놓인 돌다리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돌다리와는 다른 모양을 지니고 있다.

조선시대나 고려시대, 혹은 삼국시대에 건설되어 지금까지 전래되어 오고 있는 돌다리는 많지 않지만 나름 몇 가지의 일정한 형태를 지니고 있는데 진천 농교는 다른 여타의 돌다리와는 다른 아름다운 모양을 지닌 돌다리(石橋)이다.

어느 방향에서 찾아가든 중부고속도로를 이용하는 것이 가장 빨리 찾아가는 방법이 될 것 같다. 고속도로에서도 이 다리는 눈에 들어온다. 중부고속도로를 타고 이동한다면 증평 IC에서 진천 IC 방향으로 가다보면 중간 지점에 서울방향 오른쪽으로 강을 건너는 다리가 보이는데 이 다리가 바로 농다리이다. 물론 고속도로에서 보인다고 차를 세우면 위험하므로 고속도로를 벗어나 찾아가야 한다.

때때로 고속도로를 이용해 지방으로 갈 때마다 고속도로 옆의 입간판에 그려진 농다리를 보고, 또 시냇물에 놓인 다리를 멀리서 보며 언젠가는 반드시 찾아가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막상 길을 나섰지만 처음에는 무척이나 고생을 한 후에야 찾을 수 있었다. 물론 제대로 찾아간다면 도달하기가 어려운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때로는 얼토당토하게 고생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나에게는 이곳 농다리가 그랬다.

진천 읍내의 용화사를 둘러보고 출발했는데 정상적으로 찾아간다면 구곡리 방향으로 난 길을 가야 했다. 그런데 길을 잘못 들어 신정교를 건너 증평으로 이어지는 34번 도로를 만났다. 이 도로를 따라 한참을 달리자 오갑교를 다시 만났다. 처음에는 이 길이 옳은 길이라 생각했다. 오갑교를 건너기 전에 오른쪽으로 둑방길이 있고 이 길을 따라 계속 들어가자 고속도로 밑을 통과했다.

그리고 우회전하여 난 길을 따라 계속 가니 왼쪽으로 작은 다리를 건너 산 옆으로 나 있는 길을 따라갔다. 그리고 진천읍에서 들어오는 큰 길을 만나 농다리 간판을 보고 진입할 수 있었다. 어찌 되었든 장황하게 설명하였지만 이 설명은 제대로 찾지 못하고 빙빙 돌았다는 말이다.

정상적으로 농다리를 찾아간다면 진천읍에서 구곡리로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 가야 한다. 진천농공단지 앞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아룡과 문상초등학교 앞을 지나 구곡리로 간다. 구곡리에서 농교 안내판을 보고 고속도로 밑을 지나 농다리로 이어진다. 넓은 주차장이 자리하고 있어 차를 세우기 편하다.

진천 농다리는 1976년 12월 20일 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28호로 지정되었다. 이 다리의 모양이 섬돌 모양이지만 그렇다고 섬돌이 아닌 것이 여러 겹의 돌을 쌓아 만든 다리이니 딱히 어떤 방식의 다리라고 설명하기도 어렵다.

농다리는 여러 가지의 이름으로도 불리는데 행정구역으로 따지면 문백면 구곡리 굴티마을 앞을 흐르는 세금천에 놓인 다리로 농교라 부르거나 흔히 농다리라고도 한다.『상산지(常山誌)(1932)』에는 고려 초기에 임장군이 축조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본래는 별자리를 의미하는 28수(宿)를 응용하여 다리의 교각을 세워 28칸으로 만들었으나 지금은 일부가 없어지고 25칸만이 남아 있다. 애초에는 100m가 넘는 길이였다고 하나 지금은 줄어들어 길이는 93.6m, 너비는 3.6m, 두께가 1.2m, 교각 사이의 폭이 80㎝ 정도이다.

그 위에 길이 170㎝, 내외 넓이 80㎝, 두께 20㎝ 정도의 장대석 1개나 길이 130㎝, 넓이 60㎝, 두께 16㎝ 정도의 장대석 2개를 나란히 얹어 상판을 만들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돌을 첩첩하여 쌓아두고 그 위에 길고 넓은 바위를 얹은 모양인데 단순하지만 사실 단순한 것이 아니다. 어쩐지 이런 방식으로 설명하면 많은 학자들이 사용할 것 같은 전문 용어가 들어가지 않아 조금 촌스럽게 느껴지지만 이 다리를 설명하자면 어찌할 수 없다.

아무튼 일반적인 돌다리와는 많은 차이가 드러난다. 사력암질의 붉은색 돌들을 물고기 비늘처럼 쌓아 올려 교각을 만든 후, 상판석을 얹어 놓고 있다.

30㎝×40㎝ 크기의 사력암질 자석(紫石)을 물고기 비늘처럼 첩첩이 쌓아 만들었으므로 장마가 지거나 큰물이 내려오면 물살에 맥없이 무너지거나 일부는 강한 물살에 흔들려지거나 떠내려가며 훼손될 수도 있을 터이지만 이해하기 어렵게도 수 백 년 동안 장마에도 떠내려가지 않고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이 다리의 특징은 교각의 모양과 축조방법에 있는데, 돌의 뿌리가 서로 물려지도록 쌓았으며 속을 채우는 석회물의 보충 없이 돌만으로 건쌓기 방식으로 쌓았다.

현재의 모양을 살펴보면 교각에서 수면까지 76㎝, 수면에서 하상까지 76㎝로 옛날에는 하상이 낮아 어른이 서서 허리를 굽히지 않고도 다리 밑을 지날 수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복개로 인해 하상이 높아졌다. 그래서 매우 낮아 보인다. 작은 낙석으로 첩첩히 교각을 쌓은 방법이나 장마에도 다리가 떠내려가지 않도록 축조한 기술이 전국적으로 살펴보아도 유례가 없으며 동양에서 가장 오래되고 긴 다리에 속한다.

교각의 폭은 대체로 4m 내지 6m 범위로 나름의 일정한 모양을 갖추고 있고, 폭과 두께가 상단으로 올라갈수록 좁아지고 있어 강한 물살에 대한 영향을 덜 받게 하기 위한 철저한 배려가 보인다. 이 다리는 우리나라 어디에도 비슷한 예가 없는 특수한 구조물로 지난 세월 이루 말할 수 없는 여러 차례의 장마에도 유실되지 않고 견고하게 유지되고 있으며, 상판석의 돌은 특별히 선별하여 아름다운 무늬를 잘 보여주고 있다.

최근 뿐 아니라 이전부터 TV 드라마와 영화 등의 배경으로 종종 등장하고 있어 2000년 이전부터 널리 알려졌다. 최근에도 많은 사람이 찾고 있으며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로도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곳에서는 다리를 건너며 장난치며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을 보기가 어렵지 않다.

10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온갖 풍파에도 온전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어 눈길을 끄는 이 다리는 옛 기록에 따르면 고려 고종 때의 권신인 임연 장군이 전성기 때 고향인 이곳에 만들었다고 한다. 어느 유적이나 사적에는 사연이나 전설이 있기 마련이다.

예전부터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임연은 매일같이 세금천에 나와 세수를 했는데, 어느 날은 세수를 하다 건너편에서 젊은 부인이 물이 불어난 내를 건너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며 애를 태우고 있는 모습을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들어 다리를 만들게 됐다는 것이다. 설화의 모티브로서는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대부분의 설화나 전설이 그러하듯 어느 정도는 신격화하기 위한 이야기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지만 이 전설이 어느 정도 사실이라면 지방의 토호와 같은 위치에 있던 임씨 가문의 재력과 이 지역에서의 세도나 권력, 혹은 지역의 패자임을 보여주는 설화로 더욱 강화되고 부가되었을 것이다.

예로부터 강이나 냇물에 다리를 놓는 것은 월천공덕이라 하였으며 다리를 놓는 일은 대단한 재력이나 권력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당대의 기록이 정확히 남아 있는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임연의 다리 축조설에 대한 이설(異說)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일부 학자들 사이에는 진천 출신인 신라의 김유신 장군이 만든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돼 최근까지 논란을 빚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신빙성은 희박했었다는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무엇이 진실인지는 알 수 없다. 이 다리가 김유신의 작품일 것이라는 주장은 김유신이 신라에서 매우 뛰어난 장군이라는 것은 인정되고 존중되어야 하지만 지나치게 신격화 된 점도 사실이다. 진천 지역 곳곳을 돌아다니다 보면 이 지역 문화의 일부분을 억지로 김유신 장군에게 꿰어 맞추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지나친 억측이 난무한다는 생각은 비단 나만의 생각은 아닐 수도 있다. 겨우 100년 이내의 세월을 산 사람이 진천의 수 천 년을 지배하는 느낌이다.

아무튼 또다른 이성도 존재한다. 이설에 의하면 임연의 선조인 고려초 호족 임희에 의해 이 다리가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도 내려오고 있다. 하지만 어느 누구의 주장이든 그 근거가 미약하고, 농다리가 설치되기 이전에 대한 이해가 충분치 않은 듯하다.

다리는 한두 사람의 힘으로 놓아지는 것이 아니다. 지금이나 예전이나 다리를 놓는 일은 힘들고 오랜 시간이 필요한 대공사이고 난공사였다. 어쩌면 이 다리는 이름조차 알 수 없는 초부들에 의해 강을 건너기 위해 만들어졌을지도 모른다. 이런 역사적인 예는 아주 많다.

다리를 축조하거나, 절을 짓는일, 혹은 성을 쌓으면 당대의 지배자로서 권력을 지닌 호족이나 우두머리급에 대해서는 역사로 기록되거나 후일에 알려지지만 진정으로 피를 흘리고 땀을 흘린 사람들의 기록은 물속에 가라않는 모래알처럼 사라지기 마련이다.

달리 생각해 보면 일찍부터 세금천 양편에 펼쳐진 농경지 경작을 위한 교통로인 일종으로 돌을 던지듯 띄엄띄엄 섬돌형 다리가 존재했을지도 모른다. 다리의 시작은 늘 그러하니 말이다. 혹은 나무다리가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 다리가 오랜 시간 속에 변화되거나 새로운 변화를 거듭했을 것이다.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현재의 농다리는 임희나 임연 등 상산 임씨 일족이 축조했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비교적 정확해 보인다. 물론 그들이 주도하고 다리는 초부들이 놓았을 것이다.

특히 임연은 중앙으로 진출한 뒤 자신의 고향인 진천을 두 차례나 승격시키고 이 일대에 광대한 농장을 구축하였으므로 임연이 그의 세거지인 구곡리에서 세금천 건너편 농장을 경작키 위한 목적으로 기존 다리를 더욱 크고 견고히 만들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가장 설득력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즉 권력의 소산이 되어버리기 이전에 이곳에는 널다리 형식이라도 다리가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이 다리는 밟으면 움직이고 잡아당기는 돌이 있어 농다리라고 부르기도 하고, 울퉁불퉁한 자연석으로 엉성하게 쌓아 올린 듯한 교각과 그 위에 걸쳐 놓은 1m안팎의 상판돌의 모양 때문에 얽다는 뜻의 농(籠)자가 붙여졌다고 한다.

농다리 외에도 장마 때마다 물이 다리 위를 넘어간다 해서 붙여진 수월교(水越橋)라고도 불린 적이 있다. 또 상공에서 보면 거대한 지네가 몸을 슬쩍 퉁기며 물을 건너는 듯한 형상을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지네다리와 겨울철 농다리의 설경이 빼어난 것에서 붙여진 농암모설, 진천에 위치해 있어 붙여진 진천 농교, 농암다리 등이 있다.

농다리의 교각은 자석(磁石)을 물고기 비늘처럼 쌓아 올렸으며, 석회로 보강하지 않아 교각으로도 물이 통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돌다리는 짜맞추는 방식이지만 여처층으로 쌓는 경우는 회를 사용하여 견고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런데 농다리는 특이하고도 전례 없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 허술해 보이기도 하여 눈으로 보아서는 곧 장마에 무너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농다리는 이처럼 교각 높낮이가 다를 뿐만 아니라 교각의 간격이나 상판 크기 등이 일정치 않아 얼핏 보면 돌을 대충 쌓아 놓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10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수많은 물난리에도 농다리가 원형을 유지해 오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교각의 형태는 유선형으로 만들어져 강의 물살에 대한 저항을 최소화 했으며, 유선형 교각은 앞뒤 좌우가 대칭을 이루기 때문에 교각이 받는 수압도 어느 한 방향으로 치우침이 없이 균형을 이루고 교각 밑을 물이 돌며 파헤치는 세굴현상도 적게 나타난다.

마을 사람들은 농다리를 건너면 아낙네가 아들을 낳게 되고, 노인은 무병장수한다고 믿는 한편, 재앙을 예고하기도 한다고 말한다. 장마에 다리 상판이 뜨면 나라에 큰 재앙이 일어나고 훌륭한 인물이 사망하거나 기상이변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오래된 나무나 바위에 전설이 생기듯 이 다리도 오래되고 보니 전설이 생기는 모양이다.

어찌되었든 이와 같은 이치로 보아 농다리는 풍수지리와 전혀 연관이 없을 듯 보인다. 단순히 다리를 건너는 것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단순하게 돌을 잘 쌓는 기술 때문만은 아닌 것이 이 다리를 축조한 기술이나 이유 때문이 아니다.

수많은 숫자 중에 왜 굳이 28이라는 숫자에 집착했을까? 아무래도 이 숫자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 같다. 동양에서는 28개의 황도대 별자리를 일러 수(宿)라 일렀다. 쓰기는 이리 쓰고 읽는 것은 숙이 아니라 수라 읽는다. 보통 이 속(宿)은 숙이라 읽지만 별자리를 의미할 때는 수라 읽는다. 동양의 대표적인 별자리인 28수(宿)는 동서남북 각각 7개의 별자리가 청룡, 백호, 주작, 현무의 형상을 만드는데, 각자리는 청룡의 뿔에 해당한다.

28수는 오래도록 우리 민족의 문화로 자리하고 있었는데 조선의 경우 도성의 모든 문은 종루에서 저녁 10시경에 울리는 28번의 인산(因山) 소리에 맞추어 닫고 새벽 4시경에 울리는 33번의 파루(罷漏)소리에 맞추어 열었다.

인정에 28번 종을 울리는 것은 우주의 일월성신(日月星辰) 28수에 고하여 밤의 안녕을 기원하는 것이고 파루에 33번 종을 울리는 것은 제석천이 이끄는 하늘의 33천에 고하여 오늘 하루의 국태민안을 기원한 것이지만 이 인정소리에 도성문을 닫아 모든 사람들의 통행을 금지하였고 파루소리에 도성문을 열어 통행금지를 해제하였다.

따라서 진천농교에 28이라는 숫자를 사용한 것은 그냥 지나치는 무심한 것은 아니다. 우연히 만들어지거나 놓다 보니 그리 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다리의 크기와 폭을 조정하여 28이라는 숫자를 채웠을 것이다.

넓이를 계산하고 숫자를 맞추었으니 나름의 계산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라 보인다. 어쩌면 별처럼 영언하리라는 기원이 있을 수도 있고 신앙적인 측면이 있지 않을까 생각도 해볼 만하다.

물론 이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무심하지만 28이라는 숫자는 풍수와도 깊은 관계가 있다. 사실 동양철학을 바탕으로 하는 풍수지리 이론에 별자리 이론과 유가나 도가가 사용하는 음양오행이 적용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이러한 측면은 풍수도 점성술이나 천기를 완벽히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아울러 풍수라는 것이 우리의 생활과 동떨어진 것이나 단순히 중국의 이론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고 토착신앙이야말로 가장 풍수적인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풍수는 크게 형기론(形氣論)과 이기론(理氣論)의 두 가지 이론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중 한국의 토속적이고 자생적인 풍수는 형기론에 가깝다. 형기란 풍수지리 이론에서도 중요한 이론의 하나로 태조산에서 혈에 이르는 산세를 살피고 청룡, 백호를 비롯한 주변 산세의 형태를 일컫는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산의 형태만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산이 지닌 속성은 물론이고 기맥의 흐름을 매우 중요시한다. 산을 따라 흐르는 기의 흐름을 감지하고 산이 지닌 기운을 유추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에 비해 이기는 어느 시점에 발복할 것인가, 즉 운이 언제 오는가를 따지는 것이다. 지극히 발복을 따지는 이론이지만 역시 기맥이라는 점은 인정한다. 하도(河圖)와 낙서(洛書), 선천팔괘(先天八卦), 후천팔괘(後天八卦), 음양오행(陰陽五行), 10간(干) 12지(支), 28수(宿) 등을 통달해야 비로소 이기라는 분야에 접근이 완벽한 가능하다. 그만큼 난해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이론은 익히고 어렵고 끝이 없어 극히 일부의 학문을 도용하고 익혀 사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결국 형기가 공간의 문제라면 이기는 시간의 문제다. 공간이라는 X좌표와 시간이라는 Y좌표가 서로 만나는 교차점이 어디인가를 찾아내는 작업이 풍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산의 관상, 즉 형기에 대한 관점은 대해 이기학자들은 통일성이나 관점이 다르다고 주장한다. 이는 학습의 성과에 문제 있음이지만, 이기학자들은 형기론의 물형론을 들어 형기론이 술법에 가깝다고 공격하기도 한다.

풍수를 이야기 하는 사람마다 주장이 다르다. 물론 달리 보면 형기가 더욱 난해하고 체계가 없어 보이기도 한다. 이기는 모든 사항이 기록으로서 체계화 되어 있다는 주장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비추어 보면 산을 보는 방법은 각각의 학습이나 감각에 따라 달라질 여지가 충분하기 때문이다.

다른 의견도 있다. 특히 물형론의 경우 보는 사람마다 다르다는 이유로 이기론자는 형기를 비판하고 온전하지 못하다 한다. 그 대신 패철을 사용하여 방위를 재는 이기론은 충분한 근거가 있어 학문적으로 완성도가 높다고 주장한다.

형기론과 이기론은 오래 동안 대립과 반목을 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두 가지 이론은 모두 타당성과 역사를 가지고 있다. 풍수에서는‘형기학파(形氣學派)에 관한 책은 진서(眞書) 아닌 책이 없고, 이기학파(理氣學派)에 관한 책은 위서(僞書) 아닌 책이 없다’는 말이 회자될 정도다.

이기학파에 관한 책들은 그만큼 믿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복잡하다는 말이다. 흔히 [멸만경(滅蠻經)]이라는 책이 있는데 이기학파의 서적에 이 책들이 많이 섞여 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어느 것도 사실이다, 아니다를 주장하기에 부족하거나 근거가 약하다. 복잡하다고 해서 학문적 이론과 배경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론이 구구하고 지나치다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

그렇다고 모든 학문이 진리가 아니라는 것도 역시 문제점이다. 풍수의 천재들은 대부분 이기학파 쪽에 몰려있다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풍수에서 가장 중요한 기(氣)를 논함에 있어 형기학파가 단순명료하고 고대의 법칙에 더욱 근접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형기풍수를 익힌 사람은 형기풍수가 주라 하고 이기를 익힌 사람은 이기가 주라 한다. 이미 오래전 조선의 황실에서 결론을 내린 것처럼 형기풍수와 이기풍수를 무시할 수 없지만 형기풍수가 주가 되고 이기풍수가 부차적인 역할을 담당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중국 황실이 철저하게 형기론을 바탕으로 묘를 조성했다는 것은 많은 의미를 주고 있다. 아울러 조선의 왕릉도 형기풍수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다리 하나를 이야기 하는데 지나치게 장황한 이론을 내세운 것 같지만 28이라는 숫자는 이미 유교의 이론으로 정립되기 이전에 불교에서 사용한 이론이고 우리 문화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첨성대가 28단으로 이루어진 것은 우연이 아니다.

파악해야 할 내용도 많고 이해해야 할 것도 많은 것이 풍수이고 세상의 이치가 아닌가 싶다. 그러나 누구도 진정한 이유를 알지 못할 수도 있음을 생각하면 역사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배움도 깊어져야 한다는 당위성을 생각할 수 있다.

 

안종선교수 블로그 http://blog.naver.com/sungbosung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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