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종선(교수)
오월의 신록은 푸르기만 하더라!

바람이 불거나 바람이 불어올 때, 혹은 마치 아른거리듯 하늘이 푸르면 불현 듯 밖으로 나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럴 때는 마음에 병이 들어 지우기라도 해야 한다는 듯 불현 듯 길을 나선다.

오늘의 목적지는 경기도 여주가 되겠다. 그곳에는 수많은 문화재가 있고 절경이 있을 것이다. 세종대왕의 영원한 안식처인 영릉이 자리한 곳이고 북벌을 주장했던 효종대왕의 영릉도 세종대왕의 능인 영릉 옆에 위치하고 있다.

물론 특이하게 효종대왕의 능역도 영릉이라 부른다. 같은 지역에 있는 두 왕의 능이 같은 이름으로 불린다는 사실이 조금은 의아하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많은 사람들이 두음법칙을 적용하지 않고 효종대왕의 능은 달리 녕릉으로 부르기도 한다.

오늘의 목적지는 서희장군의 묘역이다. 사실 서희장군의 묘역을 찾아가기에는 대중교통을 많이 이용하는 나에게 불편한 점이 적잖이 있기는 하다. 자가용을 이용한다면 그다지 구애를 받지 않겠지만 대중교통을 이용한다면 적지 않은 문제들이 발목을 잡을 때가 있다. 버스를 타고 이동하기에 서희장군의 묘역은 그리 편하게 찾아갈 수는 없는 곳이다.

서희장군의 묘는 경기도 여주군 산북면 후리 산 53-1번지에 있다. 애초에 자가용을 이용하여 서희장군의 묘를 찾기 위해서 출발한다면 중부고속도로를 타고 이동하다가 곤지암 나들목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좋다.

그 과정에서 시간이 허락된다면 광주시 실촌면 곤지암리에 들러 신립장군의 묘를 볼 수도 있다. 여주에서 국도를 이용하여 찾아가는 길도 있다. 여주 읍내에서 출발했다면 365번 국도를 타고 남한강변으로 달리다 이포대교에서 산북면 상품리로 가야 한다.

5월의 신록이 싱그럽기만 하던 날, 아직은 논바닥에서 개구리가 울고 파릇한 새싹이 녹음으로 물들기 전이었다. 서일대학교 사회교육원 풍수지리학과 회원들을 3대의 차량에 분승하여 관산을 위해 여주로 출발했다.

회원들이 출발지로 삼은 서희장군의 묘역은 도로 접근성이 좋았다. 경기도 남양주시 오남읍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중부고속도로를 이용해 곤지암 나들목으로 빠져나가기로 했다.

봄을 재촉하는지 열려진 창으로 희미하게 습기 찬 바람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중부고속도로가 서울에서 호법 인터체인지에 이르는 동안 왕복 8차선이 된 이래 붐비는 경우가 많이 줄어들었으나 토요일과 일요일은 약간의 정체를 감수해야 한다.

그래도 서울에서 출발하는 사람의 경우에는 곤지암 나들목이 비교적 가까운 거리이기에 막힌다 해도 시간이 그다지 많이 걸리는 길이 아니며 고속도로가 정체되거나 사고가 나는 경우로 막힌다면 하남시에서 광주를 거쳐 곤지암으로 이어지는 3번 국도를 타거나 양평에서 이어지는 98번 국도를 탈수도 있다.

특히 서울 방향에서 고속도로를 탈 경우에는 동서울 요금소를 지나 제1중부고속도로와 제2중부고속도로로 갈라지기 때문에 제1중부고속도로를 이용해야 한다.

동서울 요금소를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곤지암 나들목이 나타났다. 곤지암 나들목을 벗어나 우회전하면 곤지암리가 나온다. 곤지암리는 인근의 도농이 모두 그러하듯 제법 큰 규모를 지니고 있으며 전형적인 도시와 농촌의 합해진 모양을 지니고 있다.

아울러 곤지암리는 행정구역상 경기도 광주시 실촌면 소재지이다. 곤지암 나들목을 나서서 여주와 양평방향으로 방향을 정해 달리다 보면 불과 2-3키로 이내에 곤지암리를 시내를 지나 여주와 양평으로 길이 갈라진다.

갈라진 길에서 좌측길로 향한다. 양평으로 향하는 365번 도로로 들어서 10여키로를 달리면 산북면 상품리가 나타난다. 상품리에서 길을 잡아 우측으로 다리를 건너면 후리이다. 초행이라 길이 익숙하지 않거나 길을 잘 찾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이곳에서 후리가 어디인지, 혹은 서희 장군의 묘가 어디에 있는지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고생하지 않는 길은 마을 사람들에게 묻는 방법이다.

후리를 거쳐 양평으로 향하는 길에서 방축으로 향하는 포장도로가 있고 이 포장도로는 작은 물을 건넌다. 물을 건너 고개로 고개를 올라가다 보면 누군가 잡아당기기라도 한 것처럼 오른쪽으로 죽 밀려나온 산이 보이고 그 산 위에 서희 장군의 묘소가 있다.

서희(942~998) 장군은 고려시대에 거란의 80만 대군을 담판으로 유혈의 전투 없이 물러가게 한 고려의 명장으로 유택은 경기도기념물 제36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후리 마을에 자리한 장군의 묘 입구에는 신도비와 재실인 상산재(象山齋)가 있다. 상산재 앞에는 적당한 크기의 주차장이 있어 자가용이라면 10여대 이상을 세울 수 있다. 재실 앞에는 2기의 신도비가 크기를 자랑하며 서 있었는데 각각 서희장군의 아버지인 서필의 신도비와 서희 장군의 신도비였다. 서희장군의 신도비는 최근에 세워진 것이다.

신도비를 살펴보니 검은 광택이 사람을 압도하는 오석이며 [고려태보내사령송검교병부상서 증태사이천백시장위 서공희신도비명(高麗太保內史令宋檢校兵部尙書 贈太師利川伯諡章威 徐公熙神道碑銘)]이라고 새겨져 있다.

길가의 제각은 나중에 살피기로 하고 여러 개의 비석을 지나 산기슭으로 오른다. 산허리를 둘러 난 산길은 산책로라고 느낄 정도로 편안하고 걷기에 편하도록 조성되어 있다.

서희장군의 묘는 신도비 정면으로 보이는 앞산에 세워져 있으며 갈지자 형태의 산길이 그다지 멀지도 않아 숨 한번 고를 시간이면 오를 수가 있다. 산길을 오르다 보니 잣나무가 늘어서 있어 봄을 시샘하듯 맑은 향기를 뿜어내고 있어 더욱 서늘하기만 했다.

최근 몸의 건강을 위해 피톤치드가 많이 나오는 침엽수림으로 삼림욕을 많이 간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곳 서희장군의 묘역으로 오르는 길기가 바로 천연적으로 피톤치드가 나오는 웰빙의 산책로가 아닌가 한다.

이끼가 낀 돌계단을 따라 비교적 잘 정돈된 길을 오르면 오래 걸리지 않아 산 능선이 잔디로 덮여 있음을 보게 된다. 산 능선으로 들어서며 위쪽으로 쌍분으로 조성된 묘역이 있고 아래쪽으로도 조성된 모역이 보이는데 쌍분이다. 위쪽으로 서희 장군과 부인을 모신 쌍분이 있고 아래쪽으로는 부친 서필의 쌍분이 있어 소위 역장(逆葬)인 셈이다.

서희 장군!
능선에 올라서자마자 스치듯 살펴보니 서희 장군의 묘는 용이 헤엄치듯 뻗어나가는 행룡간에 자리 잡았다. 언 듯 보아서는 일종의 과룡(過龍)에 해당한다고 볼 수도 것이다.

풍수지리의 영원한 고전인 [錦囊經]에 이르기를 “五代不可葬地”라는 이론이 있고 이중 과룡도 불가장지에 해당한다. 음택 풍수에서 음택지는 행룡간의 과룡에는 장사지내지 말라 했는데 조금 더 세밀하게 살필 일이다. 명성에 걸맞지 않는 묘라고 생각이 들지만 방심은 금물이다.

흔히 명성을 지닌 사람들의 묘역이라면 무턱대고 명당이라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 듯하다. 지나친 과신도 무리가 있지만 지나친 신봉도 무리가 있다. 그렇다면 모든 왕릉은 혈장이 이루어져야 하고 모든 장군, 모든 대통령의 묘역도 혈이 이루어져 할 것이다. 땅은 정직하다. 땅은 명성과 관련이 없다.
서희 장군의 묘역으로 다가가 가벼운 목례를 한다. 죽은 자는 이미 선인이니 잘잘못을 가리지 말고, 명성을 가리지 말고 선인으로서 에를 갖춤은 당연하다. 고개를 들고 살펴보니 호석과 석물에는 이끼가 자라 세월의 무상함을 보여주는 듯하나 비교적 관리가 잘되어 있어 자랑스러운 조상을 모시는 많은 후손의 숨결이 느껴진다.

울창한 숲을 베게 삼아 고즈넉하게 바라보이는 쌍분 앞에는 그다지 크지 않은 묘비가 세워져 있다. 중앙에 세워진 묘비에는 [송검교병부상서 고려태보태사내사령시장위 서공희지묘(宋檢校兵部尙書 高麗太保太師內史令諡章威 徐公熙之墓)]라 적혀 있다.

문무석이 각각 한 쌍 씩 배치되어 있고 자명등이 세워져 있으나 특이하게도 망주석은 볼 수가 없다. 이 정도의 인물이고 석물이라면 모두 갖추어져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 조상들의 예술적 미가 남아있는 석물은 도굴꾼들에 의해 사라지는 경우가 아주 많다.

도둑맞으면 찾기가 어려운 일이다. 어쩌면 이곳 설희 장군의 묘역에도 모든 석물이 갖추어져 있었지만 도둑을 맞았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아마도 서희 장군은 겸손한 사람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상석을 바라보며 문득 난 생각이다. 상석조차도 낮고 무신석도 낮으며 비석 또한 낮은 것이 장군 후손의 겸손함을 보는 듯하다. 그래서 더욱 숙연해지는 기분이다. 옥개석이 2층으로 된 장명등은 특이하여 오래도록 눈을 잡아 묶는다.

서희 장군은 960년(광종11) 18세에 갑과로 과거에 급제한 뒤 내의시랑을 거쳐 983년(성종2)에는 군정의 책임을 맡은 병관어사가 되었다. 이후 태보. 내사령의 최고직에 이르렀다.

이와 같이 정치적 활동에서도 중책을 맡았으나 외교적으로 보다 큰 업적을 올렸다. 이는 역사적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오래전에는 학생들의 교과서에도 기록되어 그 이름을 드날렸다.

그러한 점에서 지금은 과거와 비교하여 초중고등학교의 역사 교육이 과거에 비교하여 그 시간도 줄고 중요도가 낮아졌는데 새롭게 방향을 잡아 역사를 올바로 가르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해 본다.

서희 선생은 이천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가 이천서씨이기 때문이다. 본 적은 없으나 기록에 나오는 그의 외교술을 생각한다면 그의 인간됨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상상 이상으로 느껴지는 감정은 그의 당당한 위풍(威風)과 기상(氣象)은 오늘날 이천인(利川人)들의 가슴속에 연면(連綿)히 이어져 오고 있으니 이 정신이 바탕이 되어 이천이 오늘날 전국에서 가장 살기 좋은 경쟁력을 갖춘 전원(田園)도시 문화, 교육, 관광의 도시로 비약 발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서희 선생은 과연 어떤 사람인가? 우리는 그를 본 적은 없다. 그를 아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보지 않았다고 해서 사실이 존재치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다. [고려사(高麗史)]나 [동국통감(東國通鑑)]등 다수의 사료에 의하면 대략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서희(徐熙)는 경기도 이천 출생으로 자(字)는 염윤(廉允), 본관(本貫)은 이천(利川)이며 내의령 서필(徐弼)의 아들이다. 그는 성품이 엄격하고 진실하였다.

고려초 광종11년(960)에 18세로 갑과에 급제하여 몇 등급을 뛰어 광평원외랑에 제수 되었으며 그 후 여러 번 승진하여 내의시랑이 되었다

성종12년(993년)에 거란이 침입하자 서희는 중군사(中軍使)로, 시중 (侍中) 박량유(朴良柔)는 상군사(上軍使), 문하시랑(門下侍郞) 최량(崔亮)은 하군사(下軍使)가 되어 함께 군사를 이끌고 북계에 나아가 적에 대비하고 있었다. 성종(成宗)이 친히 방어하고자 서경에 행차했다가 안북부로 진군하려 하였는데 거란의 동경유수 소손녕(蕭遜寧)에 의해 고려군이 졌다는 소식을 듣고 성종은 더 전진하지 못하고 되돌아 왔다.

서희가 군대를 이끌고 봉산군을 구하러 나가니, 소손녕이 공언하며 싸움을 걸어왔다.

“우리나라가 이미 고구려의 옛 영토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지금 너희 나라가 우리 강토를 점령하였기 때문에 토벌하러 온 것이다.”

소손녕이 또 서신을 보내어 협박하였다. ]

“80만명의 군사가 도착하였다. 만일 강변까지 나와서 항복하지 않으면 섬멸할 것이니 군신들은 빨리 우리 군영 앞에 와서 항복하라.”

서희가 이 글을 보고 돌아와서 그들과 화친할 가능성이 있음을 아뢰니, 성종은 이몽전(李蒙戩)을 거란 병영으로 보내어 화친을 청하였다. 이때 감찰사헌(監察司憲, 종6품) 이몽전은 예빈소경(禮賓少卿, 종5품)으로 차함(借銜)하여 거란군 진영으로 나아가 화친하기를 청하였다. 이몽전이 적장 소손녕에게 고려를 침략한 이유를 물었다

“너희 나라가 백성을 돌보지 않기 때문에 하늘을 대신해 벌주러 온 것이다. 만일 화친하려거든 빨리 와서 항복하라”

이전몽이 돌아와서 이 내용을 보고하자 성종은 여러 신하들을 모아 놓고 의논하였다. 어떤 대신은 왕께서는 서울로 돌아가시고 중신들로 하여금 군대를 인솔하여 투항할 것을 주장하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서경 이북 땅을 갈라 주어 황주로부터 절령에 이르는 경계선을 국경으로 삼자고 하였다.

결국 성종은 땅을 갈라 주자는 중신들의 의견에 따를 생각으로 서경 창고를 열어 쌀을 백성들에게 마음대로 가져가도록 하였다. 그러고도 많은 쌀이 남자 이 쌀이 적의 군용이 될 것을 염려하여 대동강에 버리라고 명령하였다.

이때 서희가 나서서 아뢰었다.
“식량이 넉넉하면 성을 지킬 수 있고 싸움에서 승리할 수도 있습니다. 전쟁의 승패는 병력이 강하고 약한데 달린 것이 아니라, 적의 약점을 잘 알고 행동하면 되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식량을 버리려 하십니까? 더구나 양식은 백성의 생명과 같은 것입니다. 설령 적에게 이용될지언정 어찌 헛되이 강에 버린단 말입니까? 이것은 또한 하늘의 뜻에도 부합되지 않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 당시에 살지 않았고 보지는 않았지만 서희가 어느정도 강경하게 자신의 주장을 하였을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고구려와 고려는 성을 많이 쌓았기로 산성의 나라라고 불러도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풍족한 식량을 바탕으로 삼아 항전을 하거나 장기전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성종께서도 서희의 의견을 옳게 여겨 쌀을 풀어 백성에게 나누어 주고 강에 버리라는 명령을 그만 두게 하였다. 서희는 멈추지 않고 왕 앞으로 나아가 또 아뢰어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고자 하였다.

“거란의 동경으로부터 우리나라 안북부에 이르는 수백리 사이는 모두 생여진(生女眞)이 차지하고 있던 곳인데, 광종(光宗)때에 이것을 취하여 가주, 송성 등의 성을 쌓았습니다. 지금 거란이 침략한 의도는 이 두개의 성을 탈취하려는데 불과 합니다.

그들이 고구려의 옛 땅을 찾겠다고 공언하는 것은 실상은 우리를 협박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거란의 병세만을 보고 경솔하게 서경 이북땅을 떼어 주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그뿐만 아니라 삼각산(三角山) 이북 또한 모두 고구려의 옛 강토인데, 그들이 한없는 욕심으로 끝없이 강요한다면 다 내어 주겠습니까? 하물며 국토를 떼어 적에게 준다는 것은 만세의 치욕입니다. 바라건대 임금께서는 수도로 돌아가시고 저희들로 하여금 적과 한번 싸워 본 뒤 논의하여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서희가 어떤 의도로 이러한 주장을 하고 왕을 설득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에 성종도 그의 주장을 옳게 여겨 당초의 결심을 바꾸게 되었다.

소손녕은 이몽전이 돌아간 후 오랫동안 회답이 없자 드디어 안진을 공격하였다. 이에 고려는 중랑장(中郞將) 대도수(大道秀)와 낭장 유방이 맞아 싸워서 물리치니, 소손녕이 감히 다시 진격하지 못하고 사람을 보내서 항복을 독촉하였다.

성종이 화통사로 합문사 장영(張瑩)을 거란 진영에 보내었다.
“다른 대신을 우리 군영 앞에 보내어 면담하게 하라.”
소손녕은 강하게 요구하였다. 장영이 돌아오니 성종은 여러 신하를 모아 놓고 물었다.

“누가 거란 진영으로 가서 언변으로 적병을 물리치고 만세에 남을 공을 세우겠는가?”
그 기록을 믿으면 아마도 왕은 간곡하게 물엇을 것이리라 아무도 응답하고 나서는 사람이 없는 가운데 서희가 일어나서 말했다.

“제가 비록 부족하지만 어찌 감히 왕명을 받들지 않겠습니까?”
서희가 나서가기로 하였다. 이전까지의 사신은 왕이 임명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서희가 나설 즈음에는 사태가 악화되어 사신의 목숨이 위험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예로부터 사신을 목베이지 않는다 하지만 어찌 모두 통용될까? 전쟁을 할 때는 상대의 사신 목을 베어 그 의지를 보이는 법. 이는 목숨을 건 애국심이 없고서는 감히 나설 수 없는 결단이라고 하겠다. 그래서 왕은 강가에까지 나가서 그의 손을 잡고 위로하면서 전송하였다고 한다.

서희는 국서(國書)를 가지고 소손녕의 진영으로 가서 역관으로 하여금 상견례 절차를 묻도록 하였다. 소손녕이 거드름을 피웠을 것이다. 내 눈에는 그 그림이 선하게 보이는 듯 한데 이는 역사서에 기록된 사실을 바탕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대국의 귀인이니 그대는 뜰에서 나에게 절해야 한다.”
소손녕의 주장에 서희는 당당했다.

“신하가 임금을 뵐 때에는 뜰아래에서 절하는 것이 예이다. 그러나 두 나라의 대신(大臣)이 대면하는 좌석에서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재삼 말했으나 소손녕이 고집하므로, 서희가 화를 내며 숙소로 돌아와서 누워 움직이지 않다. 그러한 행동으로 보아 서희의 담력이 여간 아니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소손녕은 마음속으로 그의 인품이 비범함을 생각하고 마침내 당(堂)위에서 대등하게 대면하는 예식 절차를 승낙하였다. 서희는 소손녕의 진영 문 앞에서 말에서 내려 걸어 들어가, 소손녕과 뜰에서 마주서서 읍(揖)한 후에 당위로 올라가 예를 행하고 동서로 대좌하였다.

소손녕이 먼저 서희에게 말하였다.
“당신의 나라는 옛 신라 땅에서 일어났고 고구려의 옛 땅은 우리나라와 연접하고 있으면서도 바다 건너 송나라를 섬기는 까닭에 이번 정벌을 하게 된 것이다. 만일 땅을 떼어 바치고 국교를 회복한다면 무사할 것이다.”

이에 서희는 당당하고 조리 있게 응대했다.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는 바로 고구려(高句麗)의 후계자이다. 그러므로 나라 이름을 고려라 하고 평양을 국도로 정하였다. 그리고 경계를 가지고 말한다면 귀국의 동경이 우리 국토 안에 들어와야 한다.

당신이 어떻게 우리가 침범했다는 말을 할 수 있는가? 또 압록강 안팎도 우리 땅인데, 지금 여진이 그 중간을 점거하고 있으면서 완악하고 간사스러워 육로로 가는 것이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도 왕래하기가 더 곤란하다.

그러니 국교가 통하지 못하는 것은 여진(女眞) 탓이다. 만일 여진을 몰아내고 우리의 예전의 땅을 돌려주어 거기에 성과 보루를 쌓고 길을 통하게 된다면, 어찌 국교를 맺지 않겠는가?”

그 강개(慷慨)한 말을 들은 후에는 소손녕도 강요하지 못할 것을 알고 드디어 담판(談判)한 내용을 자기 나라에 보고하였다. 거란 임금은 드디어 장계를 내리었다.

“고려가 이미 화의를 요청하였으니 군사를 철수시켜라”
이는 서희의 담대(膽大)한 명분 싸움에서 거란이 무릎을 꿇은 것이라 하겠다.

그 후 성종 13년(994)에 서희는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여진을 내쫓고, 장흥, 귀화 두 진에 성을 쌓았다. 그 이듬해에는 또 다시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안의, 흥화 두 진에 성을 쌓았으며, 또 그 다음 해에는 선주, 맹주 두 고을에 성을 쌓았다. 서희의 북진 개척으로 이때부터 고려의 국토가 압록강 연안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그는 공사(公私)의 구별이 엄격하고 부하를 사랑하는 마음도 지극했다. 그의 인물됨을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공빈령(供賓令) 정우현(鄭又玄)이 시정칠사(時政七事)를 논한 봉사(封事)를 올렸는데 그 내용이 왕의 뜻에 거슬리는 바가 있었다. 그래서 성종은 재상(宰相)들을 모아 놓고 의견을 물었다.

“정우현이 감히 직위를 넘어 정사를 논란하였으니 그를 처벌하는 것이 어떤가?”
“지당하십니다”

대신들 모두가 찬성하였으나, 서희가 홀로 반대 하며 말하였다.
“옛부터 간언(諫言)을 함에 있어서 직분상 제한이 없었습니다. 자기 직위를 넘어 간언한 것이 무슨 죄가 되겠습니까? 저는 졸렬한 자질로 외람되이 재상의 지위에 있으면서 직책을 다하지 못하여, 관직이 낮은 사람으로 하여금 정치와 교화에 대한 잘잘 못을 논란하게 하였으니, 이는 저의 죄입니다. 더구나 정우현이 올린 시정칠사는 매우 적절하니 표창하고 더욱 권장해야 합니다.”

하니, 성종은 그의 말에 감동되고 깨달은 바가 있어서 정우현을 감찰어사에 발탁하고, 서희에게는 수놓은 말안장과 궁중에서 기르는 왕의 말을 하사하고 태보 내사령(內史令)에 임명하였다.

성종 15년(996)에 서희가 병(病)으로 개국사(開國寺)에 있었을 때 성종은 친히 가서 문병하고 개국사에 시주하였다고 한다. 목종(穆宗) 원년(元年998)에 사망하니 그의 나이 57세였다. 목종은 부음을 받고 몹시 애도하고 베 1,000필, 보리 300석, 쌀 500석, 뇌원차 2백각, 대차 10근, 전향 300량을 부의(賻儀)로 주고, 예식을 갖추어 장사를 치르게 했으며 장위(章威)라는 시호를 내렸다. 현종(顯宗) 18년 (1027)에 성종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고 덕종(德宗) 2년(1033)에 태사(太師)에 추증되었다. 아들로는 서눌(徐訥)과 서주행(徐周行)이 있다.

장군의 묘에 도착하여 참배를 한 후 주위 지세를 둘러 용(龍)과 수구(水口), 파구(破口)를 모두 살펴보았다. 명당이란 반드시 갖추어야 할 필요충분조건이 있다.

음택의 필요충분조건은 사상(四象)으로 각기 와겸유돌(窩鉗乳突)의 형태적 모양을 말하고 오악(五嶽)은 혈상이 이루어지기 위해 반드시 갖추어야 하는 것이니 각각 입수(入首), 2개의 선익(蟬翼), 묘를 쓰는 넓은 당판(堂板), 그리고 당판을 받치는 전순(氈脣)을 말한다. 이 다섯가지 중 한 가지만 이루어지지 않으면 비혈(非穴)이라 했다.

서희의 묘는 대좌형에 가깝다. 아래쪽이 잘록한 모양을 지녀 전순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그다지 뛰어난 혈판이라 볼 수 없으나 혈판이 어렵사리 이루어졌거나 무난하다 할 것이다. 서희장군의 묘 좌선 방향으로 마치 새의 부리처럼 튀어나간 맥이 있으니 가히 명당의 조건을 갖춘 곳이라 하겠다.

서희의 묘역 아래에는 서필의 묘가 자리한다. 경기도 여주군 산북면 후리 산 53-1번지, 서희 장군의 묘 아래는 부친인 서필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서필(徐弼)은 서희 장군의 부친이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꺼려하고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주장하는 역장(逆葬)인 셈이나 오래 전부터 역장은 있어왔던 일이다.

최근 일부 풍수가들이나 촌노들이 말하기를 역장은 조상을 거스르는 일이라 하나 과거에도 역장은 적잖게 있어왔다.

신립 장군의 묘, 이율곡 선생의 묘, 원두표 선생의 묘처럼 역장은 적지 않다. 학습을 위해 묘역을 찾아 이리저리 돌며 관산을 하다보면 역장을 발견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는 이미 조상의 묘를 사용했다 해도 후학의 학문이나 눈이 밝아져 행룡간(行龍間)이나 조상의 묘 주룡(主龍)에 좋은 명당이 있다면 능히 가려 사용했음을 보여주는 결과이니 일부 풍수자들의 억지에 밀려 좋은 명당을 포기하는 일이 없어야 하겠다.

장군의 묘 아래에 모셔진 부친 서필의 묘는 행룡간에 모신 서희 장군의 묘와는 달리 혈판이 조금은 애매하다. 갈지자로 흐르는 기맥의 흐름으로 보아 혈장이 이루어지기 어려운 자리임에 틀림없다.

물론 수구와 파구, 주변의 호종사(護從沙)를 모두 파악하면 약간의 흠이 있을 것이나 혈판만 살펴도 응결은 어렵다. 그나마 승생기(乘生氣)를 이루었다면 다행이다. 눈에 뜨이는 흠으로는 묘를 쓰기 위해 당판을 지나치게 깊게 파내어 심혈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주변을 둘러보니 가까운 곳에 뛰어난 문필봉(文筆峰)이 있다. 후손에 뛰어난 문사가 날 것임을 예고하는 사격(沙格)이다. 일부 풍수학자들 중에는 반드시 향이 맞아야 사격을 받아 인물이 난다고 하나 그렇다고 해서 연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조상의 묘를 모시는 일이 어디 발복만 바랄 것인가?

정민공(貞敏公) 서필(徐弼)은 시조인 이천서씨 서신일의 아들로 고려 광종 때의 현신(賢臣)이다. 서필은 글씨를 잘 써서 고려 최초로 과거를 통해 등용되어 벼슬이 대광내의령에 이르렀다. 항상 솔직한 간언을 해서 왕의 신임을 받았다.

한 번은 임금이 금배를 하사하자 [신이 금 술잔을 쓰면 폐하는 장차 무엇을 쓰시겠습니까] 하고 사양했다고 한다. 광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서필과 서희를 알고자 하면 이천서씨(利川徐氏)에 대해 알아야 할 것이다.

이천서씨의 시조는 서신일(徐神逸)이다. 서신일은 신라 52대왕인 효공왕 때에 나라의 운이 다함을 알고 이천 효양산에 복성당을 짓고 은거하면서 자칭 처사라하고 후진양성에 여생을 바쳤다. 지금의 이천 부발읍에는 이천서씨 시조인 서신일의 묘역이 효양산 기슭에 자리한다. 그래서 후손들이 은거지인 이천을 본관으로 하였다.

이천서씨 문중에는 서신일에 관한 재미있는 설화가 전해 내려온다. 이천서씨의 조상인 서두라는 신라 개국공신으로 이천의 예지명인 아성에서 대장군으로 있었고, 서신일 대에 이르러 산촌(山村)에 살고 있었는데, 하루는 사슴 한 마리가 화살을 맞은 채 사냥꾼에게 쫓겨 집안으로 뛰어 들어오므로 불쌍히 여겨 화살을 빼주고 먹이를 주며 극진히 간호해 준 다음 다시 산으로 놓아주었다.

그날 밤 꿈에 한 백발의 산신령이 나타나서 말했다
“오늘 그대의 집에 왔던 사슴은 나의 자식으로 사냥꾼의 화살을 맞아 죽게 되었는데 다행히 그대의 은덕으로 살게 되었으니 그대의 자손이 대대로 재상을 지내리라!”

나이 80이 되도록 슬하에 혈육이 없던 서신일의 부인은 그날부터 몸에 태기가 있어 아들을 낳으니, 그가 정민공(貞敏公) 서필(徐弼)이요, 서필의 아들이 바로 유명한 장위공(章威公) 서희(徐熙)로서 성종 때의 명신, 바로 그 서희(徐熙) 장군이다.

서신일은 나이 80에 서필을 낳았는데, 서필, 서희, 서눌이 과연 대(代)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서신일의 묘소는 경기도 이천군 부발읍 산촌리 효양산에 있으며 음력 10월 1일에 향사 한다.

안종선교수 블로그 http://blog.naver.com/sungbosung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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