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종선교수
화담당 경화탑

운악산은 가평군 내에 있는 모든 산중에 아름답기로 으뜸이고, 등산 중에는 산과 계곡 그리고 수림의 정취를 함께 맛볼 수 있으며 천년고찰 현등사의 정적 속에 몰입되어 볼 수도 있는 곳이다. 현등사도 이 같은 운악산의 정기를 품은 자리에 자리 잡고 있고 화담당 경화탑은 이 기운이 모아지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경내에서 당우와 탑, 그리고 어러 개의 부도탑을 살피고 나서는 경내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는 화담당 경화탑을 찾아보기로 했다. 사실 화담당 경화탑이 있다는 이야기는 오래전에 들었고 미리 자료를 확인했으나 지난 몇 차례의 방문에서 찾지는 못했었다. 이번에는 빈손으로 돌아가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경내에서 음식을 만드시는 보살님과 행자로 보이는 스님에게 물었으나 화담당 경화탑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고 한다. 분명 가까운 곳에 있으리라는 생각을 버리고 찾지 못하겠아 하고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다.

사실 전국의 사찰이나 이름난 풍수의 명소를 찾아다니다 보면 알려주지 않는 경우도 부지기수이고 때로는 문화재 보호에 막혀 눈앞에 두고도 들어가 보지 못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나중에 알았지만 스님이 몰라서 알려주시지 않은 것이 아니라 화담당 경화탑 너머에 스님들의 청정수도처가 있어 수도하는 스님들의 마음을 흐트릴까 걱정하셨던 모양이다.

현재 화담당 경화탑이 있는 등산로는 폐쇄된 상태이다. 우리나라의 등산인구는 인구 비례해서 세계최고일 것이라는 농담을 들은 적이 있다. 우리나라의 등산인구는 IMF위기를 전후하여 질적 양적 팽창을 가져왔는데 운동도 좋고 여가선용도 좋으며 레져인구의 수용이라는 점에서는 좋으나 전국의 산이 몸살을 앓고 있다는 부분에서는 조금이나마 미안한 감이 든다. 산을 뒤지고 명소를 찾아 풍수를 분석하는 학인의 입장에서는 자연에 미안한 감정이 없지 않을 수 없다.

주지 스님을 찾아 길을 여쭈었다. 어지럽히거나 산책로를 찾는 것도 아니고 등산로를 찾으려는 것도 아님을 말씀드리고 자초지종을 알려드린 후에 부탁을 드렸다.

스님의 허락을 얻어 극락전과 보광전 사이에 난 산길을 따라 올랐다. 오래도록 막아놓은 등산로이기에 허락하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도록 사람들이 내달린 길이 뼈를 드러내고 있었다. 이 길은 현등사를 둘러싸고 있는 나성을 따라 가는 길이다.

불과 300여미터를 이동하면 어렵지 않게 화담당 경화탑에 이른다.
현등사 경내를 벗어나 오솔길 같은 산길을 따라 오르다 100여미터를 갔을까? 길가에 서서 바라보니 건너편에 눈을 잡는 작은 산자락 끝이 보인다. 어림짐작으로 보아도 풍수지리에의 음택 이론에 합당한 혈판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이는 용맥 위에 그리 크지 않은 부도가 빼꼼하게 머리를 내민 어린아이의 머리처럼 보인다.

말발굽처럼 휜 굽이를 돌아 부도를 찾아가니 전순에 요석이라 불리는 돌이 박혀 있어 용솟음치는 기맥의 흐름을 느낄 수 있다. 주변은 아름다운 나무들로 평화롭기만 하다. 다가가니 완연한 혈상에 자리한 작은 부도가 어쩐지 아름다운 새색시의 모습은 아닐까 생각나게 한다.

언젠가 흑백사진으로 보았던 내 어머니의 결혼 당시 사진처럼 새악시 같은 느낌을 주는 작은 부도가 바위산을 등지고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다. 운악산은 강한 기를 지닌 산이고 수십갈래의 지각과 능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화담당 경화탑은 운악산의 정기가 현등사에 이르는 강한 기맥상에 자리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가는 산줄기를 타고 걸어 5분이 되기 전에 드디어 부도 앞에 이르니 3개의 돌을 이용해 만든 종형의 부도탑이 나타난다. 앙증맞다고 생각이 드는 것은 부도가 작기 때문만은 아니다. 낙맥에 바짝 붙여 배치한 화담당 경화탑은 주변의 기세가 강하고 습기가 없는 것을 증명하듯 건조한 느낌을 준다.

향토유적 제1호로 지정된 화담당 경화탑은 1986년 5월 2일 처음으로 보호를 위한 문화재 지정이 있었으며 등산로 폐쇄로 인해 그 동안의 번잡스러움을 이기고 한적한 휴식을 취하고 있다.

이 탑은 조선후기의 현등사 승려 화담당 박경화(1786-1848)스님의 부도탑이다. 부도의 기단석 앞면에는 화담당 경화탑이란 명문이 음각되어 있으며 이탑의 건립연대는 "무신10월입"이란 음각으로 미루어 조선 제24대 헌종 14년(1848)10월임을 알 수 있다.

이 부도탑의 주인공 화담당은 순조3년(1803)화양사에 들어가 승려가 되고 지탁대사의 불법을 이어 받았다. 화담당 스님은 말년에 현등사에 들어와 불법을 강론하고 수도에 전념하다가 현종4년(1848)에 입적했다.

이리저리 살피며 이 터가 지닌 기운을 가늠하고자 노력한다. 화담당 경화탑은 왕성한 기맥위에 자리하고 있으며 그 증거는 당판을 이루고 있는 바위들이라 할 것이다. 전형적인 혈상을 지니고 있는데 그 형상은 음택풍수 혈상론의 하나인 유혈의 형상을 지닌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현재의 화담당 경화탑이 음택풍수의 기준으로 보아 당판에서 혈심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화담당 경화탑이 자리하고 있는 위치를 살펴보면 현등사 중봉에서 흘러내린 기맥이 지현자(之玄字)와 고저기복(高低起伏)을 일으키며 현등사 방향으로 진룡(進龍)하던 중 거친 몸짓을 하며 만들어 놓은 당판이다. 낙맥으로 이어진 당판에 부도탑이 자리하고 있으나 좌우를 살피면 쌓은 흔적이 있다.
좌우에 쌓은 흔적을 제거했다고 가정해 살펴보면 당판을 보다 정확히 살필 수 있다. 현재의 부도탑 위치는 기맥이 용틀임을 하듯 기복을 일으키고 좌우로 요동치는 곳으로 입수룡(入首龍)이라 할 수 있다.

진정한 당판은 현재의 위치에서 아래쪽에 자리하고 있으며 이 자리는 아직도 확연하게 보인다. 아울러 우선익(右蟬翼)이 융기하여 귀성(鬼星)을 이루었으니 혈심을 이룰 수 있는 귀성이라 할 것이다. 정말로 당판을 찾았으나 혈심을 찾을 수 없어 입수룡에 부도탑이 자리한 것인지, 혹은 다른 이유가 있어 입수룡에 자리를 마련한 것인지는 알 도리가 없다.

화담당 경화탑이 자리한 당판은 부도의 입지로는 매우 훌륭한 자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완벽한 음택풍수의 혈상을 이루고 있음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혈상을 이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청룡방의 바위가 충(冲)을 하고 있어 묘지로는 사용하기가 어려운 곳이다. 즉 당판이 이루어졌다고 해서, 혹은 혈심(穴心)이 이루어지고 혈의 특징인 오악(五嶽)을 모두 이루었다고 해서 모두 묘를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형태상으로만 보면 선조들이 남긴 이론과 지혜에 의존하여 당판으로 인식하고 묘를 쓸 수도 있겠지만 좌청룡에 자리하고 마치 뛰어 달려드는 용의 머리에 난 뿔처럼 노려보는 듯 자리한 암석을 보면 두려움이 느껴져 이 당판을 묘역으로 사용할 수 없음을 알 수 있게 된다.

흔히 충(冲)이라고 표현되는 이 살기는 오래전부터 풍수지리에서 묘역으로 사용하거나 집을 짓기 위한 양택지 선정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는 요소이기도 하다.

양택지나 음택지를 둘러싸고 있는 여러 가지 사격(砂格) 중에서 가장 중요한 사격 중 몇 가지는 묘역을 조성한다면 반드시 후손이 피해를 보는 것으로 조상들이 기록으로 남긴 사격인데 좌측에서 돌출되어 보이는 바위는 반드시 피해야 하는 형상을 지니고 있다.

이를 달리 말하자면 직충(直冲)이라 부를 수 있다. 즉 날카롭게 갈린 칼 모양의 바위가 혈판을 충하고 있으므로 혈판에 묘를 사용한다면 후손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힐 것이고 때에 따라서는 극한의 죽음에 이를 수도 있다.

화담당 경화탑이 자리한 지세를 살피고 당판을 살펴보노라면 신은 참으로 공평하고 자연은 자신을 지키는 능력을 지녔다는 느낌을 지을 수가 없다. 아마도 이 당판은 고승의 안식을 위해 마련된 조용한 수도처인지도 모를 일이다.

따라서 부도탑의 최적지로 선정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혹은 이처럼 조용한 곳이 인간의 발과 입으로 인해 소란스러워질 것을 두려워하여 자연이 조화를 부렸을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감탄이 아니 나올 수 없다.

눈을 들어 다시 한 번 사방을 둘러본다. 화담당의 부도탑이 자리한 곳에서 바라보면 정면 방향에도 바위로 이루어진 작은 당판이 있어 부도탑이나 일반적인 탑을 하나 정도를 세울 수 있는 공간이 있는데 역시 이 당판이 전체적으로 바위로 이루어져 있어 화담당 경화탑이 자리한 당판으로 충을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서로 찌르는 형국으로 바라봄으로서 누구도 묘를 쓰지 못하는 지세를 이루고 있다.

좋은 지세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반 묘역으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자연적인 형상을 취하니 선인의 놀이터이거나 스님의 부도터가 분명하다 할 것이다. 자연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조화를 부린 것이니 인간이 지나치게 욕심을 가질 일은 아닌 듯하다. 자연의 조화에 경외심을 느낀다.

안종선교수 블로그 http://blog.naver.com/sungbosung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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