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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보의 풍수여행-3 '청산도 당리 마을을 둘러싼 돌담'
2013년 09월 30일 (월) 09:32:10 안종선교수 sungbosungbo@naver.com

청산면은 하나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청산도라고 불리는 섬이다.

전라남도 완도군의 남부 해역에 위치한 면이다. 그렇지만 청산도 하나로 이루어진 면은 아니다. 청산도가 면소재지인 것이다. 청산면은 제법 넓은 바다를 점하고 있는데 주도인 청산도를 비롯하여 5곳의 유인도와 9곳의 무인도로 구성되어 있다.

서쪽으로는 소안도, 북으로 신지도, 북동쪽으로 생일도가 있으나 비교적 멀리 떨어져 있다.

청산도는 제법 큰 섬이다. 영화 서편제가 인기를 끈 이후 유명해진 청산도는 이 청산면의 모든 것인 것처럼 보인다.

청산면의 주도인 청산도의 북쪽에는 대봉산(大鳳山, 379m)이 자리하고 있다. 남쪽에는 그에 필적하는 보적산(寶積山, 335m)이 있다. 이 정도의 높이라면 전라남도의 벌판에 솟은 어느 산보다 낮지 않다.

섬이 크고 산이 높기 때문에 물도 풍부한 편이다. 섬은 대부분 물이 귀하지만 이곳 청산도는 물이 적지 않은 편이다.

섬들의 틀징인 물 때문에 고생을 한다는 이야기는 들려오지 않는다. 곳곳에 샘도 많다. 이곳에서 발원한 계류천은 섬의 중앙부 동쪽으로 열린 곡저부를 형성하여 이곳에 상동리, 신흥리, 양중리 등의 마을을 이룬다.

 

   

 

섬의 중앙에는 높은 산이 있어 농경지가 많지 않다. 섬의 서부에 암석해안이 발달하고 있어, 청산항 일대의 도청리 일대는 면의 중심지이다. 도청리에 자리한 항구가 이 섬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약간의 음식점과 판매시설이 있다.

섬의 특징이 보여주듯 농사는 그리 흥하지 못하다. 사실 어느곳이나 비슷하지만 섬에서 농사는 부수적이다. 따라서 농업은 비교적 소규모로 이루어지며 어업꽈 연근해 양식이 주업이다.

연해에서는 미역을 양식하며, 근해에 삼치, 고등어 등의 어장이 형성되어 있다. 청산도는 면 소재지인 도청리를 비롯하여 총 13개 법정리를 관할한다. 모도 출장소가 설치되어 있다.

섬 지역은 고난의 역사이다. 이곳에 주민의 거주는 17세기 이후 임진왜란 때 이곳에 살던 주민들이 소개(疏開)되었다가 이후 다시 입도하면서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이전에도 사람이 살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이곳에 성을 쌓았다고도 한다.

이전 1681년(숙종 7) 이곳에 만호진이 설치되었으며, 이후 신지도로 이전되었다. 신지도는 완도에서 다리가 놓여 차로 이동할 수 있다.

청산도가 더 큰데 신지도로 만호군이 이전되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지만 당시 상황에 따랐을 것이니 논할 바가 아니다. 1896년 설읍되면서 당리, 읍리, 도락리 등 20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15개 리로 통폐합되었으며 당시 면 소재지는 읍리였다. 당시 지명 변화를 보면 양중리는 양지리와 중흥리, 당락리는 당리와 도락리, 국산리는 국화리와 진산리, 상동리는 상서리와 동리 지명들이 합성된 결과이다. 지금은 약간의 변화가 있다.

청산도라는 이름이 이쁜데 언제부터 이런 이름으로 불렸던 것인가? '청산도' 지명은 원래 '서산도(仙山島)'로 불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신선이 사는 것처럼 아름다운 섬이란 의미였을까?『고려사지리지』(탐진)과 『신증동국여지승람』까지 신선도로 수록되어 있다.

 

   

 

언제부터 청샂ㄴ도라는 이름이 생긴 것일까? 청산도 지명은 『세종실록』의 1483년 기사에서 등장하며 『숙종실록』의 1681년 기사에서 만호진을 청산도에 두면서 지명이 다시 나타나고 있다.

이는 이곳에 대한 지명이 조선 전기에는 청산도와 신선도 지명이 혼용되어 사용되다가 만호진이 설치되면서 청산도로 정착되었음을 보인다.

당시 해로의 요충지였고 군사 방어에서 중요한 곳이었기 때문에 고지도에서 청산도가 비교적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특히 『1872년지방지도』(청산진)에서 청산도 일대의 모습이 매우 상세히 그려져 있다.

당락리라는 마을은 제법 넓은 지역에 속한다. 특히 이 마을의 언덕에는 돌담이 세워져 있고 서편제 길이라 불리고 있다.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를 촬영한 곳으로 유명한 곳인데 야러가지 촬영이 이루어져 더욱 유명하다. 많은 사람이 찾는 곳으로 청산도 제일의 관광지이자 슬로시티의 정점이다.

당락리는 이곳 청산도의 섬마을로, 수산업과 논농사가 행해지는 곳이다. 당리와 도락리를 병합하면서 두 마을의 이름을 따 당락리라 하였다.

자연마을로는 당리, 진말, 도구통바굿골, 성터마을 등이 있다. 당리마을은 당락리에서 가장 큰 마을로, 신당이 있어 매년 정원 2일이 제를 지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서편제길 입구에 신당이 자리하고 있다. 그 아래쪽 바닷가로 도락리가 자리하고 반대편으로 당락리가 자리한다. 흔히 당리하고 하는 마을은 바로 서편제길을 따라 자리한다. 그리고 진말은 긴 밭이 있다 하여 불리게 된 이름이다.

도구통바굿골마을은 도구통(절구통)처럼 생긴 바위가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성터마을은 임진왜란 때 쌓은 성이 있는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당락리는 마을 주변에 성(城)의 흔적이 있으며, 당초에는 진말이라 하였으나 장보고의 부하였던 청주한씨의 군공을 추모하기 위하여 석모에 매년 정월5일날 제를 지내고 있는데 이를 연유하여 마을명을 당리라 부르고 있다. 

새로 쌓은 성벽이 눈에 뜨인다. 현대에서 성벽은 그 효용성이 그다지 높지 않다. 칼과 활로 전쟁하는 시대도 아니다.

그런데 왜 석성을 쌓았을까? 아무리 보아도 최근 쌓여진 석성이다. 물론 총만 가지고 전쟁을 한다면 석성이 도움이 될 듯도 하지만 무기가 현대화도니 이 시대에 석성은 그다지 도움이 되는 방어무롣 아니다. 그런데 왜 석성을 쌓았을까?

한가지 심증은 간다. 우선 청산도는 바다가 인접하고 있다. 물론 당리중 이 석성이 쌓여있는 마을은 분지의 형태를 띄고 있어 바닷가라 해도 바닷바람에 의한 피해는 그다지 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마을이 바닷가라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주변이 낮은 언덕으로 둘러쌓여 있어 바람이 드나들기는 어렵지만 태백산맥을 넘나드는 높새바람도 있듯이 이 마을에도 바닷바람이 넘어들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이 경우 이 성벽은 바닷바람으로 인한 피해를 줄을 수 있는 방어벽 구실을 할 것이다. 밭이 많은 이 지역에서 소금기 섞인 바람은 농작물을 기르는데 피해를 주기에 충분할 것이고 이 성벽형태는 곡물을 자라게 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 틀림없다.

안종선교수 블로그 http://blog.naver.com/sungbosung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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